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스타벅스 독립문역점. 이곳에 얼마 전까지도 ‘유명인사’로 불리던 단골이 있었습니다. 평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93세의 노신사. 단정한 옷차림과 멋스러운 말투까지. 그야말로 ‘젠틀맨’이었죠.
주문하는 메뉴는 늘 같았습니다. 짙은 향만큼이나 씁쓸한, 그래서 더욱 여운이 남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킨 뒤 물과 커피 사탕을 곁들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매장이 문을 연 2018년부터 언제나 같은 시간이 되면 나타나 직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3월을 끝으로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이 소식을 궁금해하던 어느 날, 한 여성이 할아버지가 쓰던 스타벅스 카드를 들고 매장을 찾았다고 합니다. 여성이 “할아버지를 기억하느냐”고 묻자, 직원은 “당연히 알고 있다. 이곳의 유명인사”라고 답했습니다. 그런 직원에게 여성은 자신이 할아버지의 손녀이며, 할아버지가 4월 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사연은 손녀가 최근 스타벅스 고객센터에 올린 글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손녀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인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할아버지를 늘 따스하게 맞아주던 직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죠. 손녀는 할아버지를 ‘젠틀맨’ ‘멋쟁이’ 등의 표현으로 소개하며 “할아버지에게는 (이 매장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느끼는 곳이자 삶의 낙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종종 손녀에게 매장 직원들과의 일화를 전했던 모양입니다. 한 직원 덕분에 휴대전화로 스타벅스 카드를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며 기뻐하기도 했죠. 손녀는 “이제 나도 스타벅스 앱을 쓸 수 있다고 자랑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며 “연말이면 할아버지의 에스프레소 사랑 덕분에 e-프리퀀시(음료 구매 쿠폰)를 빠르게 모아 다이어리를 받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직원들을 그리워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손녀는 “할아버지가 떠나는 날까지 ‘요 며칠 안 가서 스타벅스에서 날 찾을 텐데’라고 걱정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카드를 들고 매장을 찾은 날, 직원에게 이 말을 전하자 직원은 눈시울을 붉히며 따뜻한 위로와 함께 케이크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손녀는 “덕분에 할아버지의 빈자리로 텅 비었던 마음이 채워졌다”며 “할아버지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면 이 매장을 찾겠다”고 말했습니다.
손녀는 “지난해 이 매장이 국가유공자 후손 지원을 위해 새로 단장했다는 기사를 접했다”며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전하신 할아버지가 이 매장에 애착을 가지셨던 게 이러한 이유였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할아버지를 챙겨주셔서, 할아버지와 행복한 추억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글을 마무리했죠.
할아버지가 떠난 뒤 홀로 매장을 찾은 손녀는 그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커피 향을 맡으며 할아버지가 늘 바라봤던 오후의 풍경을 눈에 담았을 손녀. 손녀에게 이 매장이 할아버지를 추억할 선물 같은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건, 직원들의 따스한 응대와 이를 감사히 여긴 할아버지의 마음 덕분이 아닐까요. 6년여간 이어진 ‘젠틀맨’ 할아버지와 직원들의 인연, 그리고 손녀가 대신 전한 마지막 인사에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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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