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대구 중구 대구2호선 청라언덕역에서 내려 5분여를 걸어가면 한 초가집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계명대 동산병원 옆 근대 골목에 위치한 건축물은 인근에 즐비한 고층 건물과 달리 홀로 과거에 멈춘 듯했다.
건축물 앞에 내걸린 간판에는 ‘濟衆院(제중원)’이라 적혀 있었다. ‘고통받는 민중을 구제하고 치료하는 집’이란 뜻이다. 계명대 동산의료원이 125년 전 의료원 전신인 제중원을 3년에 걸쳐 복원한 현장이다.
제중원은 27㎡(8평) 규모의 건물로 총 4개의 방으로 구성됐다. 제중원 입구에 들어가자 곧바로 마주하는 방은 9㎡(2.7평) 규모의 수술실이다. 성인 남성 두 명이 들어가면 가득차 보일 정도로 협소했다. 이밖에도 수술실 기준 왼쪽에는 약을 조제하는 약제실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창고와 진료실이 같이 있다.
영남지역 최초의 서양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은 대구 근대 의료 역사의 시작이자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의 분야에서 근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 같은 제중원의 시작은 한 선교사로부터 시작됐다.
1897년 12월 25일 미국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우드브리지 오드린 존슨(한국명 장인차·1869~1951) 선교사가 한국 대구에 도착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길 원했던 존슨 선교사는 조랑말을 탄 채 이날 대구읍성 남문 안에 들어왔다.
대구에 입성한 존슨 선교사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중구 남성로 일대 약전골목이었다. 그는 대구 첫 교회인 남문안예배당(현 대구제일교회) 옆 머슴들이 사용하던 작은 초가집을 개조해 ‘미국약방’이란 이름으로 약을 나눠주면서 백성과 스며들기 위해 노력했다. 대구 제중원의 첫 출발이었다.
1899년 12월 존슨 선교사는 미국에 주문한 약품이 들어오고 본격적인 진료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제중원’이란 건판을 내걸었다. 제중원은 1885년 4월 서울에 세워진 조선의 왕립 병원으로 미국북장로교가 운영권을 갖고 있었다. 미국북장로교가 전국에 세운 병원 이름 모두 제중원이 된 이유기도 하다. 1900년 6월 존슨 선교사는 개원한 지 반년 만에 1700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이듬해에는 치료 환자 수가 200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당시 대구는 나병을 비롯해 결핵, 말라리아, 기생충이 성행하는 의료의 황무지였다. 당시 존슨 선교사가 나병을 치료해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병원에는 많은 나환자가 끊임없이 찾아왔다. 존슨 선교사는 한옥 한 채를 나환자 요양소로 사용하면서 소외된 자를 위해 그리스도 사랑을 실천했다.
제중원은 의료공간이자 동시에 선교의 장이기도 했다. 존슨 선교사가 선교본부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제중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초의 안과 수술을 받은 환자부터 스님, 소문난 절도범까지 다양했다. 대구 지역에 복음의 씨앗들이 움트기 시작했다.
존슨 선교사는 환자 치료를 통한 복음 전파가 사역의 최종 목적이었다. 그의 의료 선교 정신은 약 봉투에 실렸던 전도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약을 드시면 당신의 병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약을 드신다 해도 당신은 언젠가 죽어야 합니다. 당신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약이 있습니다. 그 약은 어떤 것인지 남문 안에 있는 예수교리병원에 가서 물어보십시오.”
대구=글·사진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