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 수출 통제가 이어지면서 중국 내 인공지능(AI) 반도체 회사가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제재를 받지 않는 수준으로 칩 설계를 하향조정(downgrade)한 뒤, 외국 파운드리 업체에 생산을 맡기고 있다. 다만, 미국 제재가 지속하면 첨단 반도체에서 레거시(구형) 반도체로 눈을 돌린 중국이 관련 시장을 독점해 전 세계 공급망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6일(현지시간) 로이터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중국 최고의 AI 반도체 회사인 메타엑스(MetaX)와 엔플레임(Enflame)은 지난해 말 스펙을 낮춘 반도체 설계를 외국 파운드리 업체인 TSMC에 제출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기 위한 미국 제재가 시작된 이후로 미국과 관계된 기업은 중국 수주를 받을 수 없다. 미국산 장비를 사용하는 TSMC도 해당된다.
메타엑스는 미국 반도체 회사인 AMD 간부 출신들이 2020년 창업했다. 엔플레임은 중국 최대 정보기술(IT) 기업 텐센트 등이 지원하는 회사다. 두 회사는 자사 반도체가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에 견줄 수 있다고 광고해왔다. 기술 잠재력을 인정받아 중국 정부로부터 국가 지원금을 받고, 국영기업에도 반도체를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내 역량을 갖춘 파운드리 업체를 찾지 못했다. 결국 스펙을 낮춘 설계로 TSMC에 손을 뻗었다. 메타엑스가 기존에 선보인 최첨단 GPU C500 물량은 이달 초 바닥났다. 현지 소식통은 “중국의 첨단 칩 생산 역량이 매우 제한적이며, 생산을 TSMC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기업이 TSMC만 바라보는 이유는 중국 내 첨단 GPU 양산 역량이 있는 파운드리 업체가 충분하지 않아서다. 약 44개의 업체 중 SMIC(中芯國際·중신궈지)만이 역량을 갖췄다. 하지만 SMIC의 생산 역량은 전부 화웨이에 할애됐다. 엔비디아에 대항하려고 나선 중국의 여러 AI 반도체 스타트업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 이유다.
역설적으로 첨단 반도체 생산에 어려움을 겪는 중국이 레거시 반도체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AI 기술에 사용되는 첨단 반도체 경쟁이 치열하지만 아직 대부분 수요는 레거시 반도체다. 업계 관계자는 “레거시 반도체는 자율 주행차와 스마트폰 등에도 두루 쓰이기 때문에 중국이 관련 시장을 독점한다면 전 세계 공급망에 비상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TSMC 등 글로벌 기업도 레거시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날 TSMC 계열사인 대만 뱅가드국제반도체그룹(VIS)과 네덜란드 대형 반도체 회사 NXP는 싱가포르에 합작 법인을 세우고 78억 달러(약 10조7000억원)를 투자해 반도체 웨이퍼(반도체 제조용 실리콘판) 제조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생산되는 웨이퍼는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 사용된다.
나경연 기자 contes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