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한국인도 아닌 ‘무국적자’ 재일 조선인을 품다

입력 2024-05-31 14:00
일본 오사카에 있는 키타오사카 조선학교 아이들. 이성로 목사 제공

복음화율이 1%에 못 미치는 ‘영적 황무지’ 일본에서 일본인 선교가 아닌 ‘무국적자’로 사는 재일 조선인을 보듬으며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한국인 목회자 부부가 있다. 이성로(55) 고정희(52) 메구미나채플 협력목사 부부는 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유일무이한 한국인으로 ‘좁디좁은 길’을 자처한 것이다.

이 목사 아내인 고 사모는 “60만여명의 재일 조선인은 하도 척박한 삶을 살아서 그런지 심령이 매우 가난하다. 조금만 툭 건드려도 눈물을 터트린다”며 “주님이 이들을 향한 마음을 부어주셔서 이들을 외면할 수 없다. 외로운 길이지만 이제는 외로움을 즐긴다. 외로워야 이들의 상황을 깊이 체감하게 된다”고 말했다. 잠시 한국에 들른 이 목사 부부를 최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성로(오른쪽) 목사와 고정희 사모. 이 목사 제공

이 목사 부부는 선교단체 ‘순회선교단’에서 훈련하다 2008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순종하며 나아겠다’고 서원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땅은 일본이었다. 이들은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2011년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있는 한인교회의 청빙으로 일본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2년 뒤 단기선교로 일본을 방문한 한국교회 성도들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들었다.

일본 오사카 성북조선초급학교의 수업 시간 모습. 이 목사 제공

“일본에 살면서 혹시 우리 민족이나 북한을 위해 생각할 의향 있으세요.”

그렇게 해서 한국교회 성도들과 함께 오사카 도요타시의 한 조선학교를 방문했다. 이 목사는 전교생이 8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 목사는 “마치 타이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까무잡잡한 어린이들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게 신기해 보였다.

장학금 전달식 후 얼마 안 돼서 고 사모는 오사카 거리를 지나가다 한 할머니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장학금을 전달받은 한 학생의 할머니였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 후예로 5대 가족이 모여 살고 있었다.

고 사모는 “이 가족과 식사 교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재일 조선인의 애달픈 사연을 듣게 됐다”며 “일본에 있는 재일 조선인의 조상은 대부분 경상도와 제주도 등에서 일본의 강제노역으로 끌려왔으나 대한민국의 해방 후 여러 사정으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에 살지만 일본인·한국인도 아닌 ‘조선인’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무국적자의 삶이 척박하다 보니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은 유일하게 학교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 목사 부부는 이들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이 일본에 부르신 이유를 선명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안정적인 한인교회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이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이 목사는 “한국교회가 북한과 복음 통일을 위해 기도하지만 일본 땅에 있는 재일 조선인에 대해선 잘 모르지 않냐”고 반문하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들을 품고 기도하며 나아갈 것을 주문하셨다”고 말했다.

고정희(오른쪽) 사모가 키타오사카 조선학교 학생과 찍은 모습. 이 목사 제공

이 목사 부부는 2017년부터 오사카에 있는 히가시오사카 중급학교를 시작으로 후쿠시마 조선학교, 기타오사카 조선학교, 제4초급학교 등 4개의 재일 조선인 학교에서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학교 청소부터 음식 바자회 참여, 김치 전달 등 이들이 필요로 하는 일에 적극 나선다. 자택을 도서관처럼 꾸며 아이들이 마음껏 한글 동화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현지 교회인 메구미나채플이 이 사역에 뜻을 함께하며 협력한다.

재일 조선인들이 지난해 경기도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기념촬영을 한 모습. 이 목사 제공

재일 조선인은 한국에 오고 싶지만, 여권이 없다 보니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다. 이들의 소망을 알게 된 이 목사 부부는 오사카대한민국영사관에서 발급한 여행 증명서를 받아 2019년과 지난해 한국을 방문하는 ‘하나의 꿈 여행’을 추진했다. 30명의 재일 조선인과 함께 서울 경복궁, 천안 독립문, 경주 첨성대, 경기도 파주 통일전망대 등 전국 곳곳에 있는 명소를 방문했다.

고 사모는 “한국교회가 탈북민을 품고 사역하듯 이들에게도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며 “한국교회가 이들을 위해 마음을 열고 중보기도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