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이른바 ‘VIP(대통령) 격노설’과 관련해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3차 소환을 검토하는 등 수사 강도를 높이고 있다. 야권은 국방부가 경찰에 이첩된 ‘채상병 사건’ 기록을 회수한 이유로 VIP 격노설을 지목한다. 공수처는 28일 채상병 특검법 부결로 시간을 벌었으나 대통령 격노가 실재했는지, 사실이라면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 등 까다로운 ‘법적 허들’을 넘어야 하는 상황이다.
VIP 격노설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7월 31일 대통령실 회의에서 채상병 사건과 관련해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하느냐’며 격노했다는 의혹이다.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은 같은 날 ‘경찰 이첩 보류’ 지시를 했다. 해병대 수사단이 8월 2일 지시에 불복해 경찰에 이첩한 기록은 반나절 만에 국방부로 회수됐다. 그 사이 대통령실·국방부·국가안보실과 김 사령관 등 군 관계자들 사이 다수의 통화가 이뤄진 기록을 공수처가 확보하고 수사 중이다.
윤 대통령 격노를 직접 들은 것으로 지목된 이 전 장관은 “들은 적 없다”고 부인한다. 반면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은 김 사령관으로부터 격노설을 전해 들었다는 입장이다. 공수처는 김 사령관에게서 격노설을 들었다는 또 다른 해병대 간부 진술도 확보했다.
공수처 1차 과제는 격노설을 직접 들은 당사자의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박 전 단장 주장은 현재로선 ‘전언의 전언’이다. 이 같은 진술은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한 차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김 사령관이나 이 전 장관이 인정하지 않는 한 VIP 격노설은 법정에서 증거능력이 없는 진술”이라며 “김 사령관과 이 전 장관의 입을 열어야 하는데 이를 돌파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는 최근 김 사령관을 두 차례 소환해 강도 높게 조사했는데, 3차 조사도 검토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확인돼도 직권남용 혐의 적용은 만만찮은 과제다. 직권남용은 공무원이 직무 권한을 남용해 타인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을 때 성립한다. 법조계에서는 이 전 장관에게는 수사단 업무에 대한 지휘 권한이, 윤 대통령에게는 이 전 장관에 대한 포괄적 직권이 인정된다는 해석이 많다.
다만 격노 수준을 넘어 구체적 지시를 통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점이 확인돼야 직권남용 혐의가 성립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수도권의 한 고법 부장판사는 “대통령이 단순히 사건에 대한 법률적 의견을 물으며 짜증을 낸 것인지, 직접적으로 수사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인지 두 가지 해석이 양립 가능한 상황”이라며 “문제된 발언 정도로는 대통령의 직권남용죄 성립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군내 사망사건은 범죄 혐의 인지 즉시 민간으로 이첩해야 한다는 군사법원법에 비춰볼 때 박 전 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었는지도 쟁점이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해병대 수사단에 수사 권한이 없다고 인정된다면, 수사를 하지 말라는 윗선 지시가 정당한 업무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에 대해 “박 전 단장에게 법률상 독립적 수사 권한이 없고, 수사단장의 고유 권한을 전제로 한 직권남용 범죄는 성립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박 전 단장 측은 범죄 혐의를 인지할 조사 권한이 인정된다고 반박하고 있어서 양측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린다.
결국 공수처는 사실관계 파악부터 까다로운 법리 적용까지 모두 돌파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 상황이다. 법조계에서는 녹록지 않은 수사지만 철저한 진상규명이 불가피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초동의 한 중견 변호사는 “박 전 단장이 이미 항명죄로 기소된 상황이라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며 “어떤 이유로 갑자기 국방부에서 사건을 회수한 건지 정확한 진상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