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성범죄, 유서로 고백했지만…대법 “유죄 인정 못해”

입력 2024-05-07 18:27

한 남성이 15년 전 성범죄 사건을 자백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겨 이를 근거로 공범들이 기소됐지만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뒤집혔다. 대법원은 고인이 반성과 참회보다는 피고인들의 형사 처벌을 목적으로 유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기억이 과장되거나 왜곡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특수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A, B, C씨에게 각각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7일 밝혔다.

앞서 D씨는 2021년 3월 서울 양천구 자택에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A, B, C씨와 중학교 동창이었다.

유서에는 D씨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 2006년 11월 피고인들과 한 학년 후배인 여학생을 불러내 술을 먹이고 차례로 유사성행위하고 간음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D씨는 유서에 “도대체 그날 왜 그런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이해를 할 수 없고, 제 자신을 용서할 수도 없다”며 “공소시효도 남았고 이 사건이 꼭 해결되길 바란다”고 적었다.

D씨가 남긴 유서를 계기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은 피해자와 그의 모친 진술 등을 근거로 지난 2021년 12월 A, B, C씨를 재판에 넘겼다.

하급심 판결은 엇갈렸다. 1심은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사건 직후 산부인과 진료를 받았지만 성폭력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은 점, 피해자 진술에 의하더라도 성폭력 여부가 명확치 않은 점 등을 무죄 판단 근거로 들었다.

2심은 그러나 “D씨 유서 작성 과정에 제3자의 강요나 회유 등이 개입됐다고 볼 정황을 찾을 수 없다”며 유서가 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작성된 만큼 A, B, C씨의 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D씨가 허위 내용이 담긴 유서를 작성해 피고인들을 무고할 만한 동기나 이유도 찾을 수 없다는 점도 유죄 판단의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유서는 D씨가 피고인들과 함께 술에 만취한 피해자를 강간했다는 중대한 범행을 고백하는 내용”이라며 “피고인들에게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이 아니기에 유서 내용의 진정성을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을 무죄 취지로 다시 뒤집었다. 대법원은 D씨 유서에 구체적 범행 내용에 대한 진술이 없고, 피해자의 진술과 명백히 배치되는 부분도 존재하는 만큼 유서의 신빙성을 온전히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피고인들과 D씨 중 일부만 범행하고 나머지는 가담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 간음행위가 아닌 다른 성적 행위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D씨는 사건 후 약 14년 넘게 지나도록 A, B, C씨나 피해자에게는 물론,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이 사건을 언급하거나 죄책감을 호소한 적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은 “유서에 진실만 적혀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또 “이 사건 유서는 사건 발생일로부터 무려 14년 이상 지난 후 작성됐다.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고, 어린 시절 기억이라면 더욱 그렇다”며 “시간 경과에 따라 기억이 과장되거나 왜곡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