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거장 차이밍량 감독 “‘행자’ 11번째 작품 전주서 촬영할 것”

입력 2024-05-03 18:07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 사흘째인 3일 오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베스트웨스턴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차이밍량 감독(왼쪽)이 이강생 배우와 함께 '행자 연작'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예술영화의 세계적인 거장 차이밍량 감독이 12년을 이어온 ‘행자 연작’ 10편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영화관에서 ‘행자 연작’ 10편이 모두 상영되는 건 전주국제영화제가 처음이다.

전북 전주시 베스트웨스턴플러스 전주 호텔에서 3일 진행된 ‘차이밍량-행자 연작 특별전’ 기자회견에서 차이밍량 감독은 “(‘행자 연작’은) 영화관에서 상영되면 좋을 거라 생각한 작품인데, 처음으로 10편을 모두 극장에서 상영하는 대범한 선택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기쁘다”며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전주에서 11번째 ‘행자 연작’을 촬영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전주에서 11번째 ‘행자 연작’을 촬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매우 신기하다. (전주에서) 굉장히 재밌는 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라며 “아직 전주가 낯설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전주를 둘러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차이밍량 감독의 페르소나인 배우 이강생은 “한국에서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매우 기대하고 있다”는 소감을 밝혔다.

왼쪽부터 '곳'(2022), '무소주'(2024).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차이밍량 감독이 연출한 ‘행자 연작’은 붉은 승복을 입은 행자(이강생)가 맨발로 느리게 걷는 장면들을 담은 영화들의 모음이다. 2012년 ‘무색’으로 시작된 ‘행자 연작’은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10번째 작품 ‘무소주’까지 10년이 넘는 기간을 이어져 왔다. 특별한 사건이나 이야기, 음악 없이 다양한 국가의 길거리를 행자가 느리게 걷는 모습이 펼쳐진다. 행자는 중국 고전 ‘서유기’의 삼장법사가 모티브다.

왼쪽 위부터 '무색'(2012), '행자'(2012), '몽유'(2012), '금강경 '(2012).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롱테이크로 촬영된 화면 속엔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전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담겼다. 미세하게 떨리는 행자의 승복이나 한 걸음을 매우 집중해 내딛느라 떨리는 행자의 다리, 발 근육이 클로즈업돼 보이기도 한다. 영화를 정해진 틀 안에만 가두기를 거부해온 차이밍량 감독은 ‘행자 연작’을 통해 영화가 스토리텔링에 한정되지 않는 이미지의 예술임을 입증한다. 차이밍량 감독은 “이미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걸 싫증을 내고 영화 보길 포기한 시대가 도래했다. 영화와 영화관은 지금 개혁이 필요한 시대”라고 했다.

그가 ‘행자 연작’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상업적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에 싫증을 느껴서였다. 차이밍량 감독은 “2013년에 ‘떠돌이 개’를 촬영한 뒤 영화를 촬영하는 작업에 싫증이 났었다. 당시 영화는 상업적인 방면에서 너무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고, 그게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런 제한들이 저를 점점 구속했고, 그에 맞춘 시나리오를 쓸 수가 없었다. 뭔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새로운 방식으로 상영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 사흘째인 3일 오후 전북 전주시 완산구 베스트웨스턴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차이밍량 감독이 '행자 연작'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차이밍량 감독은 영화의 형식에서만 새로움을 꾀한 게 아니라 영화를 공개하는 방식에서도 도전을 해왔다. 극장이 아닌 온라인 플랫폼이나 미술관에서 공개하는 식이다. 차이밍량 감독은 “영화라는 건 다른 매체로 대체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영화가 드라마나 내용, 장르 때문에 그 안에만 갇혀있다면 새롭게 나아가는 데 제약이 있는 셈”이라며 “지금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자유가 좀 결핍돼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유로운 창작을 추구하는 미술관에서 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작품 앞에서 몇 시간을 서 있어도 상관없는 그 자유로움을 영화에서도 추구하고 싶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그는 “관객들이 제 영화를 보며 다른 느낌을 받길 바랐다. 제 영화를 보다가 졸리면 자도 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작품을 통해 더 깊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며 “저와 관객은 평등한 관계다. 제가 관객을 두려워 않듯 관객들도 제 작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왼쪽 위부터 '물 위 걷기'(2013), '서유'(2014), '무무면'(2015), '모래'(2018).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차이밍량 감독과 오랜 세월을 함께 작업해온 이강생은 다른 작업과의 차이를 어떻게 느꼈을까. 그는 “차이밍량 감독과 촬영할 때 가장 유쾌하고 편하고 재밌다. 특별히 준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며 “유일하게 힘든 건 체력이 소진되는 거다. (느리게 걷는 게 힘들어)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 다리를 부들부들 떠는데도 감독이 컷을 안 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촬영하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묻자 그는 “마르세유에서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제게 5유로를 주더라. 그걸 받아야 할지 고민하는 바람에 정말 롱테이크로 촬영했는데 NG가 났다”며 “노후대책을 하나 찾은 것 같다. 전주에서 촬영할 때 그릇을 하나 바닥에 두고 걸으면 노후에 쓸 수 있을 듯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영화 ‘청소년 나타’로 1992년 데뷔한 차이밍량 감독은 ‘애정만세’(1994)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국내에서 개봉한 작품은 많지 않지만,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며 국내 관객들을 만나왔다. 차이밍량 감독은 “지금은 관객들에게 영화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라며 “큰 화면으로 정해진 구도 안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그 자체로 매력과 마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전주=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