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국가가 지급하는 ‘유족구조금’이 재판에서 도리어 가해자에게 유리한 양형으로 판단되고 있다. 가해자가 감형될 것을 우려한 유족이 구조금 수령을 거부하는 사례도 이어지면서 ‘신속한 피해자 지원’을 내건 법무부의 범죄피해자 보호·지원 계획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대법원 양형기준 감형인자에서 유족구조금을 제외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서울 서초구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에서 만난 안성훈 선임연구위원은 “법원이 가해자의 금전적인 지급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기계적으로 가해자에게 유리한 양형 사유로 판단하고 있다”며 “범죄 피해에 대한 국가 책임은 무뎌지고, 피해 회복은 더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는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따라 범죄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유족에게 구조금을 지급한다. 관할 검찰청에서 범죄피해구조심의회 심의를 거쳐 구조금을 지급하고, 이후 검찰이 가해자에게 가압류 등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이다. 구조청구권은 피해자의 헌법상 권리이고, 헌법재판소도 국가의 보호 의무와 최소 구제의 필요성을 인정해 왔다.
하지만 일부 1·2심 법원은 유족구조금을 피고인에게 정상 참작할 수 있는 ‘임의적 감경 요소’로 판결하는 관행을 보여왔다. 국가가 구상권을 행사해 피고인이 추후 강제 변제한 유족구조금을 ‘피해 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보는 것이다. 안 연구위원은 “국가가 고액 상습 체납자에게 강제 징수를 해놓고 ‘모범 납세’라고 세금을 깎아주는 것과 같은 모순적 상황”이라고 비유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피해자들이 국가의 유족구조금을 거부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최근에도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 경기 군포 음식점 살인 사건 등의 유족이 피고인의 감형을 우려해 구조금 수령을 거부했다. 강원도 영월에서 남자친구에게 191차례 흉기로 찔려 살해당한 피해자의 유족도 1심 판결 전 수령한 구조금이 피고인에게 정상 참작된 뒤 “양형에 영향을 미칠 줄 알았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범죄 피해자를 위한 신속한 ‘원스톱 지원’을 내건 법무부의 범죄피해자 보호·지원 제도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법무부는 신속·정확한 범죄피해자 구조를 내걸고 2022년 4월 ‘원스톱 범죄 피해자 보호·지원 서비스’도 시작했다. 하지만 유족이 구조금을 거부하면 국가 지원이라는 의무 이행 역시 중단되는 것이다. 일부 검찰청에서는 피해자에게 판결이 확정된 뒤 구조금을 수령하는 방안을 안내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안 연구위원은 “피해 회복에도 골든 타임이 있다. 피해 발생 직후부터 치료비, 생계비 등의 부담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며 “구조금은 피해자가 원할 때 신속히 적시에 지급되는 게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안 연구위원은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기준표 상의 감경요소 항목에 ‘유족구조금 제외’가 명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살인범죄 양형기준에 따르면, ‘실질적 피해 회복’과 ‘상당한 피해 회복’은 각각 특별·일반양형인자에 해당한다. ‘실질적 피해회복’은 “진지한 노력 끝에 합의에 준할 정도로 피해를 회복시킨 경우”를 의미하고, ‘상당한 피해 회복’은 명확한 기준이 없어 법관 재량에 맡겨진다.
안 연구위원은 “법관이 양형 기준에서 벗어난 판단을 하려면 그 사유를 판결문에 구체적으로 밝혀야 해 부담이 된다”며 “(양형 기준 변경은) 재판부의 오판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족구조금을 임의적 감경 요소로 판단하는 법원의 관행이 사법부 불신을 부른다는 비판도 했다. 그는 “피해자를 무시하고, 피해자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린 판단”이라며 “가해자의 감경 사유로 작용한다는 부분부터가 피해자 감정을 건드린 것이다. 피해자와 국민의 사법부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 연구위원은 현재 법무부 범죄피해자보호실무위원회 위원, 한국피해자학회 연구이사,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위원, 서울고검 형사상고심의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으며, 대법원 양형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
이정헌 기자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