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에 각인된 ‘타자 혐오’…거스르려면 예수에게 배워라

입력 2024-05-02 17:41
한 노숙인이 지난해 12월 스페인의 관광명소 세비야 대성당 앞에서 구걸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 연관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예배 시작 전 교회 입구에 남루한 차림의 노숙인이 구걸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성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해 한 목회자가 노숙인으로 변신한 이 사회실험은 온라인상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며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 2018년 미국의 한 대형교회에서도 진행한 이 사회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타자’(他者)인 소외 이웃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는가. ‘이웃을 넘어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는 예수의 대담한 명령대로 사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가.”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로 연합감리교회(UMC) 감독을 역임한 저자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교회 사무실을 나서던 그에게 한 노숙인이 다가와 “밥 살 돈을 달라”며 구걸했다. 의구심을 품고 20달러를 건넨 그에게 노숙인은 뜻밖의 말을 한다. “고맙다고 인사해주길 바라겠지만 나는 하지 않겠다. 당신이 날 도운 건 예수 때문이니까.” 속으로 ‘저 양반은 주님을 어떻게 저리 잘 알까요’라고 생각한 저자는 이내 깨달음을 얻는다. ‘저 사람은 어찌 저렇게 너를 잘 아느냐’는 주님의 질책 같은 답변이 마음을 찔러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저자 윌리엄 윌리몬. 위키피디아 제공

낯선 이를 두려워하는 건 인간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 본능이다. 뇌의 변연계는 타인을 마주하면 위험 여부를 감지해 신호를 보낸다. 보상을 주는 이라면 다가가고 그렇지 않다면 도망치라는 주문이다. 인류사 역시 타자를 향한 배제와 포용의 반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인 혐오증’을 뜻하는 ‘제노포비아’(xenophobia)는 배제의 대표적 사례다. 이 증세가 깊어지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시리아인은 난민으로 가장한 테러리스트’와 같은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 사회로 널리 확산하는 건 타자에 대한 왜곡된 두려움이 깔려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본성을 거슬러 타자를 형제자매 삼으라고 말한다. 또 본인이 직접 원수인 인간을 먼저 사랑함으로써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 이 사랑으로 ‘완벽한 타자’에서 의인이 된 그리스도인(롬 3:24)에겐 ‘타인 배제’란 본성에 맞서 포용이란 선택지를 택할 자유가 주어진다. 저자는 “이런 면에서 교회는 타자 혐오 관리법을 가르치는 일종의 학교”라며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하는 하나님보다 타자를 더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참된 문제”라고 꼬집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흑인교회 총기 난사 사건 희생자인 클레멘타 핀크니 목사의 장례식에서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고 있다. 핀크니 목사는 백인 우월주의자 청년의 총격으로 숨졌다. 당시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은혜로 모든 게 바뀔 수 있다"라며 이 찬송가를 불렀다. 국민일보DB

요한일서 4장 18~21절을 근거로 “타자에 대한 기독교인의 기본 입장은 환대”임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저자가 누차 강조하는 건 “타자를 선량한 피해자로 애써 포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랬듯 이들 역시 “선과 악이 뒤섞인,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존재”다. 그는 “타자의 적응을 돕는 건 상당한 부담과 도전이 따른다는 걸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용기 내 타자를 환대할 것”을 당부한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동일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본능을 넘어 타자를 ‘주님의 형제와 자매’로 섬길 때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경험한다. “신앙고백에 부합하는 존재”로 점차 바뀌는 변화, 곧 ‘성화’다.

타자의 범주엔 이주민이나 난민만 포함되는 게 아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 역시 타자다. 상대에겐 내가 타자일 수 있다. “성가신 옆집 사람보다 바다 건너편의 낯선 이웃을 사랑하기가 오히려 쉬운 법”이다. 동족에게 조롱당하면서도 이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역시 타자였다.


타자를 참된 이웃으로 바라볼 때 교회는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강조한 ‘막연한 꿈속의 사랑’이 아닌 ‘행동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저자의 말이다. “타자에 대한 적개심이 애국심으로 칭송받는 이 불안한 세상에서 낯선 이를 환대하는 일은 더욱 중요한 사역이 됐다.… 사회의 온갖 편견을 바로잡기 위한 믿음직한 해결책은 교회다.”

168쪽 분량의 가벼운 책이지만 내용만큼은 묵직한 책이다. 각종 예시와 이론을 맛깔나게 활용해 ‘설교자의 설교자’란 수식어가 과장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읽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이주민 250만 시대’를 앞둔 우리 사회의 타자는 누구인가.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