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남해에 둘러싸인 전남 여수시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에는 안경을 쓴 한 남자가 10대 남성을 포옹하는 모양의 조각상이 있다. ‘사랑과 용서’ 조각상이다. 안경을 쓴 이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1902~1950) 목사다. 10대 남성은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다. 손 목사는 안재선을 양아들로 삼으며 그를 용서했고 평생 예수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순교했다.
국민일보는 24일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장종현 목사)과 함께 생전 손 목사가 기도하며 거닐었을 그 길을 걸어봤다.
‘사랑과 용서’ 조각상에서 손 목사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켰던 애양원교회로 이르는 길 중에는 ‘고난의 길’이라 불리는 길이 있다. 북한군의 총살로 순교한 손 목사의 장례 행렬이 지나갔던 길이다.
이번 여정에 동행한 허은철 총신대 교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손양원 목사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공산주의에 맞서다 감옥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손 목사는 생명을 위협하는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았던 당시 한센인들을 죽음 직전까지 품었다. 꺾이지 않는 그의 신념은 앞서 호남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린, 푸른 눈의 서양 선교사가 보인 헌신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양동교회 1대 담임목사 유진 벨(1895~1925) 선교사가 있다.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그는 1897년 목포 개항과 맞물려 지금의 전남 목포에 양동교회를 세웠다. 당시 전남 지역 최초의 교회였던 이 교회는 이후 개항기 기독교 선교의 전진기지이자 호남 지역 기독교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또 1919년 4월 8일 일어난 목포 3·1 만세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전날 찾은 양동교회는 1910년 준공된 전형적인 서양식 조적조 건물이 그대로 보존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교회의 2대 담임인 레이놀즈 선교사는 한글 성경 번역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고, 10대 담임인 박연세 목사는 일제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교회에는 이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다.
호남 지역 근대 기독교 역사는 순교로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벗하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근대 교육을 이끈 선교 유산도 있다. 전남 순천 매곡동 일대에 조성된 이른바 순천매산등선교마을에서는 이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1913년 미국 남장로교 순천선교부는 이곳 난봉산자락 언덕, 조선 시대부터 죽은 아이들을 묻어온 버려진 땅 ‘풍장터’ 위에 교회, 학교, 병원을 세우고 소외된 한국인을 품었다. 휴 린턴, 코잇, 조지 와츠, 프레스턴, 크레인 등 1986년까지 80여 명의 선교사들은 안력산병원, 매산학교, 애양원 재활직업보도소 등을 통해 예수 사랑을 실천하며, 지역 내 교육·의료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다섯 개의 코스로 구성된 1.97㎞에 이르는 순례길을 따라 돌아보면, 현대식 건물과 근대문화유산 건물이 조화를 이뤄 마치 열린 박물관과 같은 느낌을 준다. 선교사 가옥부터 한국형 1호 구급차까지 곳곳의 문화유산을 찾는 재미가 있다. 특히 애양원 재활직업보도소와 코잇 선교사 가옥 등은 이르면 오는 5월 일반인에게 최초 공개될 예정이다.
허 교수는 “당시 서양 선교사들은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꾸며 지역민과 동화되려 노력했다”며 “그 노력은 지역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냈고, 죽음의 땅이었던 풍장터를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땅으로 거듭나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일제는 자신들이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고 주장하나, 사실 당시 선교사들이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며 “그런 역사적 가치를 발굴해 내야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여정을 이끈 이철 목사도 “기독교 정신은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다”며 “한국교회가 갈등이 깊어진 우리 사회에 화해를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과 북이 뼈저린 아픔을 겪었지만, 서로를 용서하고 감싸 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생긴 갈등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는데 신앙의 선진이 남긴 유산과 정신이 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신안·목포·순천·여수=글·사진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