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핵심 경합주로 꼽히는 애리조나주 대법원이 160년 전 제정된 강력한 낙태 금지법을 부활시켰다. 산모 생명이 위급한 상황을 제외한 모든 사례의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결정이다. 낙태권 이슈가 대선 핵심 쟁점으로 재부상할 조짐을 보이면서 이 문제에 거리를 두려 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입장이 난처해졌다.
애리조나주 대법원은 9일(현지시간) 산모 생명을 구하기 위한 때 외에는 낙태를 금지하고, 낙태 제공자는 2~5년의 징역형을 내리는 내용의 낙태금지법을 되살리는 결정을 내렸다. 해당 법은 애리조나가 주로 편입되기 48년 전인 1864년 제정됐다. 애리조나주는 그간 임신 15주까지 낙태를 허용해 왔지만,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이후 다시 과거 법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번 소송은 공화당 소속 전직 법무장관이 제기했다.
찬성 의견을 낸 존 로페즈 판사는 “(임신 주수에 따른) 선택적 낙태에 대한 권리를 승인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낙태 반대 단체인 ‘친생명 아메리카’의 마조리 다넨펠서 회장은 “이번 판결은 생명을 위한 투쟁에 있어 중요한 진전”이라며 “엄청난 승리”라고 환영했다.
법원은 추가적인 법적 주장을 듣기 위해 낙태 금지 시행까지 2주간의 유예기간을 뒀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낙태금지법 시행을 막을 수 있는 선택권은 거의 없어 보인다고 전망했다.
민주당은 강력 반발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수백만 명의 애리조나 주민들은 곧 극단적이고 위험한 낙태 금지령 아래 살게 될 것”이라며 “이는 여성의 건강이 위험에 처하거나 비극적인 강간이나 근친상간 사건이 발생한 때도 여성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 잔인한 법은 여성이 투표권을 확보기도 전에 제정됐다”며 “여성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공화당 선출직 공무원들의 극단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애리조나주에서 낙태법을 감독하는 민주당 소속 크리스 메이예스 법무장관은 “어떠한 금지 조치도 시행하지 않겠다”며 대법원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애매한 입장에 서게 됐다. 그는 전날 동영상 메시지를 통해 “낙태 문제는 각 주가 투표나 입법에 따라 결정할 것이며, 결정된 것은 해당 주의 법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낙태 허용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하며 이 문제와 거리를 두려 한 것이다.
그러나 텍사스, 앨라배마, 미시시피, 플로리다, 애리조나 등 주요 지역에서 강력한 낙태법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낙태 문제는 다시 달아오르게 됐다. 당장 바이든 대선 캠프는 이번 결정을 언급하며 “이것이 전날 도널드 트럼프가 지지한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악시오스는 “애리조나의 낙태 (금지) 폭탄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낙태 문제 견해를 테스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애리조나주는 핵심 경합주여서 대선 판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애리조나주는 올 초까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차범위 밖 우위였지만, 최근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추격을 시작하며 박빙 구도가 형성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대부분의 미국인은 낙태권 폐지에 반대하며, 이 문제가 지지하는 후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답한 정치적 온건파의 수도 급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NYT)도 “이번 결정은 중요한 대선 경합주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