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도 기생생물도 아닌 존재라 양쪽 모두에게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을 도우려 하는 수인(전소니)을 기생생물이 이해하지 못하자 강우(구교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살아 숨만 쉬는 거면 생존이라 생각하지. 인간은 달라. 인간은 사람들 속에 살아야 생존이야.”
지난 5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기생수: 더 그레이’는 공존에 대해 말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과 공존하기보다 인간만을 위해 기꺼이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인간을 비판하면서도, 공존의 해답은 또 인간 안에 있음을 기생생물과의 싸움을 통해 전달한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9일 만난 연상호 감독은 “원작 ‘기생수’란 작품이 가진 주제는 모든 생물은 공존한다는 거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공존하는 모든 존재는 기생한다”며 “하지만 기생을 달리 표현하면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말도 된다. ‘기생’이란 게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거라는 걸 수인과 하이디가 깨닫는 과정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작품은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6부작 동안 촘촘하게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데 핵심이 되는 ‘조직’이란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경찰 조직, 기생생물 전담팀 더 그레이 조직, 강우가 몸담은 폭력 조직, 종교집단 등 다양한 조직이 나오지만,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이는 조직이란 대(大)를 위해 개인이란 소(小)를 희생하고 배척하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인간의 힘을 발견하게 되는 건 모순적이게도 다시 조직이다.
연 감독은 “완전히 아웃사이더였고 혼자라 생각했던 수인의 주변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수인은 이들을 끌어당기며 변화시킨다”며 “여러 조직의 안 좋은 모습이 담겼다고 해서 인간은 결국 혼자임을 주장하는 작품이냐 한다면, 그와 정반대라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공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존에 몰두해 조직 내 다른 구성원들을 등한시했을 때, 그 끝엔 파멸만이 기다린다는 건 경찰 원석(김인권)과 목사 권혁주(이현균)의 결말에 담겼다.
수인과 하이디가 원작 만화 ‘기생수’의 신이치, 오른손이와 달리 직접 대화할 수 없어 강우가 중간다리 역할을 해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추가된 설정이다. 같은 날 만난 전소니는 “신이치와 오른손이가 직접 친해지는 것과 달리 다른 존재(강우)를 두고 가까워지는 게 좋았다”며 “사회라는 게 혼자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보고 깨달아가는 게 사회 안에서 인간으로 사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인이에게 강우가 없었다면 뭘 해내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진 않았을 것 같다. 지켜야 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수인이가 움직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런 메시지를 작품 속 인물이 긴 대사로 직접 말하는 것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린다. 전하고자 하는 바가 선명해서 좋다는 반응도 있지만, 너무 장황하고 직접적이라 흐름을 깬다는 반응도 있다. 이에 대해 연 감독은 “명확한 걸 좋아하는 편이다. 국내 관객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제가 상상하기 힘든 관객에게도 보이는 작품이라면 메시지가 좀 더 명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원작 ‘기생수’의 오랜 팬이라고 강조한 연 감독이었던 만큼 엔딩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일종의 팬픽(팬이 만든 2차 창작물)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고 했는데, 마지막 장면에 신이치를 등장시키면서 ‘기생수: 더 그레이’의 세계관이 원작과 만나는 지점을 열었다. 연 감독은 “마지막 장면은 8년 후의 이야기고, 어떤 사건 때문에 신이치가 그레이팀에 와서 얘기하는 상황”이라며 “(시즌2의 이야기가) 완벽히 나와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큰 흐름은 존재한다”고 귀띔했다. 전소니는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신이치, 오른손이와 수인, 하이디가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전소니에게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물었다. 그가 꼽은 대사엔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압축돼있었다. “정수인은 이상한 아이다. 사람에게 받은 수많은 상처를 가지고도 결국에는 누군가를 믿는 걸 포기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먼저 손 내밀 줄 아는 그런 인간이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