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임초리에서 5

입력 2024-04-04 09:50

하루는 명동에 있는 거상다방에서 그이의 친구들이 나를 불렀다. 그곳에는 한국건업 이사장 사위였던 송수호씨와 훗날 서교호텔대표가 된 이종웅씨, 한전의 종신씨와 외국에 나가 있던 희창씨와 후배 정관씨도 함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12월을 넘기지 말고 결혼하라고 하며 “괜히 좋은 신랑감 놓치지 말아요”라고 농담까지 했다. 친구들의 진솔한 권유를 듣고 나니 더욱이 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처음부터 결혼을 전제로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먼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를 알게 된 동기부터 그의 신상에 관해서 과거와 현재 가족관계와 신장과 몸무게까지 상세한 사연을 편지로 써서 붙였다. 열흘쯤 지난 어느 날 아버지의 회답이 등기우편으로 도착했다. 나는 명필체 아버지의 글을 받고 감격하며 글을 채 읽기도 전에 눈물을 쏟았다.

“사랑하는 내 효녀 딸에게”라고 시작한 아버지의 글은 마치 한편의 대서사시 같았다. “객지에서 수많은 날을 어린 동생들까지 데리고 고생하면서도 힘겨운 말 한마디 없는 딸, 네 부모가 져야 할 짐을 대신 지고도 단 한 번 흔들림 없이 걸어온 내 딸아”로 이어져 동생들 걱정은 접고 오직 너에게 열린 길을 꿋꿋이 가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네 부모는 너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지만 상천하지에 한 분이신 네가 믿는 너의 하나님이 너의 앞날을 축복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는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결혼 허락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 같은 마음이 편지지에 흠뻑 배어있었다.

열 아들보다 소중한 내 딸을 만난 그 청년은 분명한 하나님의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격려까지 해 주셨다. 나는 그 편지를 들고 무릎 꿇어 기도한 후 목사님을 찾아갔다. 편지를 다 읽으신 목사님은 “아버지가 참으로 훌륭한 인격자시다. 글씨도 아주 명필이시는구먼”하시면서 아버지를 축복하셨다.

또 “이 편지는 한번 읽기로는 아깝네”하시며 거듭 읽으신 후 “우리 아가씨가 부모 복을 많이 타고났네”라고 하셨다. 이어 아버지가 신세대 분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시며 딸의 신앙을 존중히 여겨주는 것을 퍽 기뻐하셨다. 목사님은 당신 생각도 마찬가지라고 하시며 뜻을 정했으면 올해를 넘기지 말고 그의 뜻을 따르라며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더 좋아하시니 오늘 기도하고 마음을 정하자”고 하셨다.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서 결혼식 일정을 정하자고 말씀하셨다. 셋방 교회지만 식장은 교회로 정하고 주례는 당회장 목사님이 하시고 피로연은 근처 식당이 있으니 결혼식은 간소하게 할수록 좋다고 하셨다. 그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날짜는 12월 초순이 좋겠다고 하셨다. 세부적인 내용은 그이와 의논해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와 나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너무 급하게 날짜를 잡게 되니 서운한 마음은 들었으나 어려운 환경은 결혼과 동시에 조금씩 나아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만날 때마다 감사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이모님 내외분과 외할머니, 외삼촌이 계셨다. 급하기는 하지만 가족이 서오릉에서 만나서 상견례 겸 야유회를 하자고 했다. 그날 그의 부탁에 맞추어 굽이 높은 새 신발을 신어서 아담하고 예쁘다는 칭찬은 들었으나 발뒤꿈치에 상처가 나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아픔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봄의 눈물>
- 김국애

눈이 내린다
눈은 눈물이 되려고 내리는가
처마 밑 고드름도 울고
내 눈에도 고인 눈물,
눈물인지 눈∼물인지
버석한 땅에 눈물이 흥건하다

봄은 소리를 낸다
갈나무 밑에서도 바스락
호미와 괭이 널브러진 남새밭에
실금 터지는 소리
창문 여는 인적의 소리

종달새 우짖는 들녘에
은은하게 퍼지는
풀벌레의 울음소리
가지에 꽃망울 터지고
봄바람은 들녘을 회전 한다
팔십억 숨결을 덮는 봄 향기

봄은 우리게 내리신 사랑
값없이 내리신 신의 선물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