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임초리에서 4

입력 2024-04-04 09:40 수정 2024-04-06 10:03

마당에 들어서는데 3살짜리 막내 조카가 칭얼거리고 있었다. 바지에 배변한 것이다. 나는 웃옷을 벗고 아이 바지를 벗겨 치우고 깨끗이 씻어 주었다. 물지게로 물을 져다 먹는 것을 몰라서 물 한 통을 거의 다 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표정을 읽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는 워낙 많은 형제 틈에서 자란 탓에 일거리 많은 것은 내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형님댁에서 조카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의 형수는 첫 대면에서도 따뜻함과 섬김의 사람으로 느껴졌다. 세 명의 어린 조카들과 봉순이라는 시골 친척도 함께 살고 있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시동생 자랑을 하며 삼촌이 내 얘기를 많이 해서 보고 싶었다고 했다. 너무 어린 아가씨인데 도대체 몇 살이냐고 물었다. 스물다섯 살이라고 하니 내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듣던 대로 인상이 너무 좋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형님과 형수 조카들까지 온 가족이 모두 인물이 훤한 집안이었다. 특별히 신랑감인 그는 누가 보아도 품위 있는 체격과 서구적 이목구비를 타고 난 사람이었다. 평소에 그를 보는 사람들은 성품이 얼굴에 비친다고들 했는데 그날은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몹시 우울해 보여서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해 질 녘 나를 바래다주면서 우리의 만남이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생각에 어제저녁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그의 말은 세상에 누가 판자촌에 빈털터리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 나라에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했다.

“나는 우리나라 끝자락에서 상경한 섬 처녀랍니다.” 거기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 하월곡동에서 두 동생을 데리고 월세 사는 처지라고 그를 위로했다. 역시 남자는 흙으로 지음 받아서 부실하나보다고 했더니 본인의 몸에 갈비뼈가 모자란다고 자신의 몸에서 몇 대나 빼내 가셨는지 주님께 아직 따져보지 못했다고 재치 있게 유머로 응대했다.

어느 늦가을 저녁 우리는 함께 무교동 낙지집에서 저녁을 먹고 파고다공원엘 갔다. 12월에 월남에서 큰형이 잠시 출장 나오는데 그때 결혼식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1년 후에 하는 것이 어떻겠냐 했더니 그때도 자신은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와 결혼하는 시점이 부자가 되는 날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그는 두 달 동안 틈틈이 대학 친구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공릉에 있는 공과대학 근처 배 농장에서 친구들을 만나 쪽 파티를 하던 어느 날은 신촌 로터리 이종웅 친구의 서점에서 만났다. 또 혜화동의 서울대 정문 앞에서 모여 함께 식사하기도 했다.

어느 주일날에는 공대 기독동문회에 나를 데려가 자신의 약혼녀라고 소개했다. 많은 학생에게 축하의 박수를 받았다. 그의 친구들은 수재들이면서도 독실한 신앙인들이었고 성실한 생활 철학을 소유한 이들이었다. 흔히 사람을 알아보려면 주변의 친구를 보라는 말은 친구는 곧 자신을 증명하는 바로메타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국내외의 그의 주옥같은 친구들과 어울려 나누던 대화들과 아름다운 추억들이 떠오르면 내 얼굴이 환해진다.


<봄꽃처럼>
- 김국애

승강기를 탔다
누군가 내 어깨를 만진다
아, 아 배낭끈이 꼬인 것
나는 어깨너머로 손을 폈다
덥석 잡은 친근한 손
봄꽃처럼 피어나자
부질없는 우리의 삶
따뜻한 손길의 부재로
혹여 꼬이고 상한 마음
작은 관심마저 낭비라고
치부해버리는 세상에
봄꽃처럼 향기롭다
서로 주고받는 품앗이
너와 내가 서로 살피고
내일은 너와 또 다른 관계에서
만져주는 섬세한 배려
봄꽃처럼 피어나자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