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가을 어느 날 그는 내게 자신의 장단점을 얘기해달라고 했다. 나는 내 느낌대로 그에 장점을 말해 주었다. 진실함, 평화로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의지의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그와 나는 마음 왕좌에 주님을 모시고 있는 분명한 사람들임을 서로 확인했기 때문에 그때 가난하던 우리의 처지에 대해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 역시 나에게 장점 몇 가지를 말해 주었다. 만날 때마다 즐겁고 표정이 밝은 것, 환한 미소, 섬세하고 다정다감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어머님과 너무 닮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사랑을 독차지할 텐데 아쉽다고 했다.
약속한 두 달의 만남이 끝나는 날 주일 오후에 그와 나는 남산 타워에서 성경책 위에 오른손을 겹쳐놓고 결혼을 약속했다.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면서 “우리가 지금은 어렵고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때때로 아버지 같고 가끔은 친구나 오빠 같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2주 후에 그는 자신이 기거하는 형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형은 월남전에 참전한 헌병 대장으로 복무 중인 직업군이라고 했으며 집은 답십리라고 했다. 그날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답십리 행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천근만근 발을 무겁게 옮기며 자주 쉬었다.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동생들이 있어 저녁에 일찍 들어가야 하는데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가족들이 우리 결혼을 반대하는 것 같은 눈치가 보여서 불안하기도 했다.
답십리라는 동네는 버스로 한참을 더 가야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는 중간에서 내렸다. 뚝섬으로 나뉘는 길이 있었는데 반대편 다리 밑에는 탁한 폐수가 흐르는 하천이 있었다. 그가 하천 바로 위의 판자촌 동네를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늦가을 오후 사람들이 물지게를 지고 오가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가는데 여러 사람이 그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반갑게 맞아서 그가 이 동네에서 봉사활동을 했나 부다 생각했다. 그를 따라가는데 동네 좁은 골목 싸리나무 문 앞에서 우뚝 서더니 여기가 내가 사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도 그를 보며 그저 웃음이 나왔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는지’하는 어이없는 웃음이었겠지만 동시에 입구에서 잠깐 묵상을 했다. “그래요, 주님 감사합니다. 어렵게 살지만 그늘이 없는 훌륭한 인격의 사람을 제게 선물로 주셨으니 이제 땀 흘려 수고하며 아름다운 미래를 일궈 나갈게요”라고 기도했다.
<가물치>
- 김국애
펄펄 살아 날뛰는 가물치
무쇠 솥을 달구어
통소금을 뿌리고
강제로 집어넣는 순간
솥뚜껑이 들썩들썩
너를 죽여 내가 살겠다는
잔인함은 나도 싫었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몸은 왜 약골이 되어
고을이 들썩이는
몸서리치는 아픔을 겪는가
가물치여 미안하다
뼈 까지 녹여준
그대죽음이 나를 살렸다
모유 한 방울 못 먹였다는
내 허약함 가슴앓이 된 엄마
새록새록 떠오르는 아픈 기억
엄마 미안해요 사랑해요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