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감춰져 있던 평양의 마지막 선교사 존 무어(한국명 문요한, John Z. Moor,1874~1963)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했다. 소요한 감신대 교수(한국교회사)가 2022년 말 학교법인 광성학원(이사장 최준수)의 의뢰를 받아 진행한 개교 130주년 기념연구가 최근 신간 ‘광성을 사랑한 선교사 존 무어’로 열매를 맺었다. 소 교수는 2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무어 선교사는 이북 지역을 대표하는 선교사였음에도 이상하리만치 우리 역사 속에서 감춰져 왔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에서 ‘무어’라고 하면 승동교회를 세운 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한국명 모삼열, Moore, Samuel F, 1864~1906)를 떠올리기 쉽다. 평양의 존 무어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미국 감리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로 1903년 내한해 평양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며 160여개의 교회와 30여개의 학교를 설립했다. 소 교수는 “무어는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 되기까지 한국인에게 기독교 복음과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평양의 대표적인 서양 선교사”라고 소개했다.
무어 선교사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에 참여했고 3.1 만세 운동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40여년간 50만 달러를 모금해 평양 선교를 위해 사용했다. 자신이 설립한 학교뿐 아니라 이북의 여러 학교와 교회를 돕다 보니 지역의 목사와 학교장들이 매일같이 그의 주택에 모여들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무어 선교사와 관련한 자료는 미국 드류대학교 내 미 연합감리교 역사 자료실에 잘 보관돼 있다. 서신과 선교 보고서만 2625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자료 양이 많다. 소 교수는 “무어 선교사는 그 어느 선교사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양의 자료를 남겼다”며 “그런 그가 연구되지 못했던 이유는 그를 따르던 목회자 대부분이 1940년대 친일로 전향하며 그가 일구어 놓았던 선교지를 친일의 기독 교단 아래 예속하기 시작하면서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웠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를 따르던 목회자들은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과 이듬해 상해 침공 등으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하면서 친일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제의 비호 아래 조선 감리교회의 수장이 된 정춘수(1875~1951)다. 태평양전쟁 1년 전인 1940년 일제는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면서 사실상 미국을 적국으로 간주한다. 이때 정춘수는 무어 선교사로부터 광성고등보통학교 정의여학교 여자성경학교 평양요한신학교 등에 대한 소유권 이전 사인을 받아낸다.
1941년 무어 선교사는 쓸쓸한 모습으로 한국을 떠난다. 무어 선교사의 제자였던 이윤영(1890~1974) 목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평양역으로 전송을 나가니 참으로 쓸쓸한 장면이었다”며 “그렇게 붙어 다니던 많은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친우로는 이환신 목사와 나 둘뿐이고 불청객인 형사 2인이 왔었다”고 기록했다. 소 교수는 “그를 지금까지 기리지 못했던 이유는 한국인 교역자의 친일로 그에 대한 흔적 지우기가 복구되지 않았던 점, 후손들의 무관심이 가장 크다”면서 “역사 연구에 있어 이념화된 분단으로 이남 지역 연구에 집중한 것도 한 이유”라고 꼽았다.
광성학원은 이번 13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학교의 초대 이사장인 무어 선교사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미 연합감리교 역사 자료실을 통해 입수한 문서의 번역 작업은 잃어버린 무어 선교사를 한국교회 역사 안으로 다시 끌어 올리는 기초 작업이다. 최준수 광성학원 이사장은 “무어 선교사의 선교 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우리 학교의 또 다른 100년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의미를 밝혔다.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