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미 용 퀼트?···빛이 되어 인권 살리는 중입니다!’

입력 2024-04-01 16:05 수정 2024-04-01 20:33
서울 양재 누르센터에서 프랑스 자수 수업을 듣고 있는 수강생들이 미소를 짓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1일 서울 양재천 카페골목에 마련된 한 공방에 들어서자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자수용 바늘을 들고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밑그림을 그린 린넨 천을 자수틀에 끼워 팽팽하게 한 뒤 한 땀씩 수를 놓는 게 프랑스자수의 기본 작업이죠. 꽃이나 동물, 음식 등 예쁜 모양으로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 연말엔 크리스마스 장식을 표현한 작품이 인기가 좋아요.”(이미현 누르프렌즈 대표)

공방 한편엔 목재 가공용 기계부터 퀼트 프랑스자수 리본공예 등 전시 작품들까지 작은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도구와 소품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 대표는 “얼핏 보면 취미 생활을 즐기러 문화센터에 온 수강생들 같지만 이들 중엔 중동지역 난민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담금질하는 분들이 상당수”라고 귀띔했다.
이미현(왼쪽 두 번째) 누르프렌즈 대표가 양재 누르센터에서 신승후씨에게 프랑스자수 기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지난해 여름 교회 청년들과 레바논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신승후(21)씨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떠나기 전 현지 문화와 사회적 환경을 공부하다 퀼트를 배워 현지 여성들에게 가르쳐주는 게 큰 도움이 된다는 얘길 듣고 처음 이곳을 찾았다. 신씨는 “11일 동안 레바논에서 머물면서 수공예 기술의 필요를 더 느끼게 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며 “업그레이드 한 실력을 갖고 몇 개월 후 다시 중동 지역으로 봉사를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서울과 수원에 한 곳씩 운영 중인 누르 센터의 시작은 2004년 요르단의 수도 암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사였던 남편의 안식년을 맞아 함께 요르단을 찾았던 이 대표의 눈에 들어온 건 이라크전쟁으로 밀려들어온 난민들과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외출 한 번하기 조심스러워하는 요르단 여성들이었다. 안식 대신 난민들을 위한 의료 활동을 하기 시작한 남편 곁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에 전주예수병원의 초석이 돼준 폴 쉴즈 크레인(1919~2005) 선교사와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 헤들스턴 크레인(1888~1973)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

“미술에 조예가 깊던 플로렌스 크레인 선교사가 조선의 여성들에게 공예를 가르치고 테이블보, 손수건 등을 만들어 학비를 벌게 했다는 자서전 내용이 떠올랐어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 어깨 너머로 배웠던 재봉틀 솜씨에 제 전공(금속공예)을 활용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몇 명이 모여 바느질 할 수 있을만한 작은 방 한 칸을 마련해 아랍어로 ‘빛’을 뜻하는 누르센터로 이름을 지었다. 생계가 어려웠던 요르단 여성 4명으로 시작한 수업은 입소문이 나면서 한 달 만에 10명을 훌쩍 넘기더니 수강 대기자까지 생겼다. 결국 방 3개짜리 건물로 이사를 한 뒤 25명을 두 개의 클래스로 나눠 수업해야 했다.

이 대표는 “퀼트와 자수로 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한 돈으로 생애 처음 세탁기를 샀던 아주머니가 눈물 글썽이며 기뻐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상처입고 위축됐던 한 여성이 위로와 환대를 느끼며 일상이 바뀌고, 그 가정에 변화가 생기는 과정이 곧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물드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누르센터는 누룩처럼 퍼져나갔다. 지금은 레바논 타지키스탄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내 10개의 센터가 일상의 변화와 경제적 자립이 절실한 이들에게 쉼터가 돼준다. 현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들고 실력을 갈고 닦아 문화센터를 열기도 한다. 개인의 자립이 사회의 자립을 움트게 하는 셈이다.

해외 센터와의 협업을 통한 현지 여성 지원도 계속 진행 중이다. 300여명의 누르센터 수강생 중엔 아직 상품화할 수 있을 만큼 숙달된 실력이 부족한 이들이 많다. 수강생들이 1차 작업을 한 퀼트, 자수, 리본 아트 작품을 한국으로 보내오면 누르프렌즈의 공예 전문가들이 2차 작업을 통해 상품성을 더한다. 그렇게 제작된 제품을 판매한 수익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시 보내주는 방식이다.

“누르프렌즈의 소명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엄성 회복이 필요한 이들에게 ‘빛으로 하나 되는 친구’가 돼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보듬었을 때 그 안에 있던 굳어진 마음의 돌들이 빠질 거라 믿어요(웃음).”(이 대표)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