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클라이밍은 산악 등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암벽 환경을 재현한 인공 시설물을 등반하는 스포츠다. 까다로운 구조물을 오직 손과 발만을 이용해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선수의 체중은 곧 기록으로 직결되는 핵심 요소다.
따라서 체중을 최대한으로 가볍게 유지하는 것은 클라이밍이라는 종목에서 당연한 순리이자 법칙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살을 빼서 기록을 단축한다’는 낡은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며 클라이밍의 오랜 전통에 반기를 든 인물이 나타났다. 그것도 올림픽 스포츠 클라이밍 종목 초대 금메달리스트 얀야 간브렛(슬로베니아)이 그 주인공이다.
세계선수권대회 8관왕을 차지하며 25세 나이에 이미 ‘역대 최고의 여성 클라이머’ 자리에 오른 얀야 간브렛은 지난해 7월부터 암벽등반 선수들이 겪고 있는 거식증 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나섰다.
그간 클라이밍계에서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돼 왔던 선수들의 섭식 장애와 건강 문제를 공론의 장에 올려놓은 것이다.
26일(현지시간) CNN이 공개한 인터뷰에서 그는 “거식증과 체중 문제를 유발하는 클라이밍 문화 및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클라이밍계의 지나친 체중 감량 문화가 운동선수들이 끼니를 거르거나 식사량을 줄이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잠재력 있는 어린 클라이밍 선수들이 일찍부터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주위에 수많은 동료 선수들이 체중의 함정에 빠졌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친구들을 도우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졌다”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고 말했다.
간브렛에 따르면 다수의 스포츠클라이밍 선수가 ‘운동선수의 상대적 에너지 결핍증’(RED-S)으로 고통받고 있다. RED-S는 활동량이 많은 운동선수들이 충분한 칼로리를 섭취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질환으로, 운동선수의 신진대사, 뼈 건강, 면역 체계, 심혈관 건강, 생리 주기, 정신 건강은 물론 운동 능력까지 손상시킬 수 있다.
앞서 간부렛은 지난해 7월 인스타그램에 ‘정말 다음 세대의 선수들을 원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더 이상 클라이밍 선수들이 건강 문제로 고통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클라이밍 문화의 변화를 촉구했다.
이 게시물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암벽등반계 전체에 파장을 일으켰다. 여성 클라이밍 종목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미국의 사샤 디줄리안 역시 간브렛의 문제 제기에 지지를 표명했다.
간브렛을 비롯한 선수들이 직접 변화를 촉구하고 나선 결과, 지난달 12일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은 스포츠 종목 최초로 대회 이전 거식증 검사를 의무화하기로 결정했다. 연맹은 올 여름 파리 올림픽 이전까지 거식증 관련 심사 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간브렛은 인터뷰에서 “상황이 바뀌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의 뒤를 잇는 새로운 세대를 위해 상황이 개선되기를 희망한다”며 “내가 클라이밍을 통해 얻은 모든 것을 어린 선수들에게 환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발가락 골절로 장기간 대회에 나서지 못한 간브렛은 최근 재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파리 올림픽 출전을 준비하는 중이다. 그는 “아직까지 내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정상에 서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양우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