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사라졌다”… 병원 실수로 뒤바뀐 두 남자의 65년

입력 2024-03-27 00:05 수정 2024-03-27 10:55
병원 측 실수로 서로 뒤바뀐 삶을 살게 된 리차드 보베(왼쪽)와 에드워드 앰브로스(오른쪽). BBC 홈페이지 캡처

병원 실수로 서로 뒤바뀐 삶을 살아야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클리셰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이가 불우한 환경에서,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이는 반대로 유복한 환경에서 크며 서로 상반된 운명을 살아간다는 전개는 현실보단 영화나 드라마에 더 익숙하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나 접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가 캐나다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BBC, CBC 등 외신은 21일(현지시간) 65년 만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두 남자의 기구한 운명을 조명했다.

2020년 겨울, 당시 65세였던 캐나다인 남성 리처드 보베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어부 겸 사업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자신이 “반은 프랑스인, 반은 인디언”인 메티스(원주민 혼혈)라고 소개해 왔다. 아버지가 프랑스인, 어머니는 크리족 원주민이라 믿으며 메티스 족 정착촌의 통나무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보베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혈통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그의 딸은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아버지에게 간단한 DNA 혈통 검사 키트를 선물했다.

검사 결과는 의외였다. DNA 분석 결과 보베의 혈통은 프랑스나 인디언이 아닌 폴란드, 우크라이나, 독일 유대계 혼혈인 것으로 나타났다. 검사 키트가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는 검사 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얼마 뒤 보베와 다른 지역인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에 사는 여성 에블린 스토키도 같은 업체 제품으로 DNA 검사를 받았다. 에블린 역시 검사 결과가 믿기지 않았다. 검사 결과 혈육이 있을 경우 별도로 통보해주는데,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 일면식은커녕 알지도 못하는 혈육(동생)이 있다는 것이었다.

에블린은 DNA 검사 업체 웹사이트의 메시지 기능을 통해 혈육으로 통보된 보베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이들은 서로의 과거를 되짚은 끝에 에블린의 동생 에드워드 앰브로스가 보베와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태어난 사실을 알게 됐다.

이를 토대로 병원 측 실수로 보베와 앰브로스가 신생아 시절 뒤바뀐 사실을 확인했다. 1955년 매니토바주의 한 지역병원에서 몇 시간 간격을 두고 태어난 두 사람은 병원 직원들의 착오로 보베는 앰브로스의 친부모, 앰브로스는 보베의 친부모에게 보내졌던 것이다.

우크라이나어로 미사에 참석하고 피에로기(동유럽식 만두)를 즐겨 먹던 앰브로스는 자신이 우크라이나 혈통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몸엔 캐나다 원주민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실을 안 그는 “마치 집에 도둑이 들어 모든 걸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모든 과거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고 심경을 드러냈다.

지난 목요일인 21일, 캐나다 매니토바주 총리 왑 키뉴는 보베와 앰브로스가 겪은 기구한 운명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병원 측 실수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주(州) 총리가 직접 나서 사과 의사를 표명한 배경에는 그들의 엇갈린 정체성으로 인해 드러난 캐나다 사회의 부당한 차별과 폭력이 놓여 있었다.

이들이 유년기를 보낸 1960년대는 캐나다에서 ‘60년대 스쿱(60’s Scoop)’이라 불리는 문화학살 정책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원주민 문화를 ‘야만’으로 낙인찍은 캐나다 정부는 이들을 교화하고 문명화한다는 명목으로 각 부족 자녀들을 백인 가정에 강제 입양시켰다. 원주민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무분별하게 떼어내는 모습이 아이스크림을 퍼담는 모습과 비슷해 60년대 스쿱(숟갈)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본래 우크라이나 혈통이지만 원주민 부모 밑에서 자라야 했던 보베는 60년대 스쿱의 피해자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메티스 족 정착촌에서 자란 그는 술집으로 출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여동생들을 돌보고 때로는 음식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가 8살이 되던 무렵 보베와 두 여동생은 어른들이 외출한 틈을 타서 들이닥친 정부 요원들에게 끌려갔다. 여동생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원들에게 무자비한 폭행까지 당했다. 결국 그들은 백인 가정에 강제 입양됐다. “백인 부모들은 우리를 강아지 고르듯 선택해 데려갔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다”고 보베는 회상했다.

반면 앰브로스는 원주민의 자녀이지만 유복한 우크라이나 이민자 집안에서 자랐다. 딸만 셋이었던 그의 부모에게 앰브로스는 보물같은 존재였다. 앰브로스는 “나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다. 내가 받은 사랑은 모두 보베가 받아야 했을 몫”이라고 착잡한 심정을 밝혔다.

두 남성은 2022년 4월부터 매니토바주를 상대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며 법적 다툼을 이어왔다. 이들의 요구에 주 정부는 무응답으로 일관해왔으나, 최근 원주민 출신인 왑 키뉴가 매니토바주 총리로 취임하며 갈등 해소를 위한 물꼬가 트였다.

60년간 서로 뒤바뀐 삶을 살아온 보베와 앰브로스에게 공식 사과한 왑 키뉴 매니토바주 수상. 캐나디안 프레스 유튜브 캡처

캐나다 최초의 원주민 출신 주 총리인 왑 키뉴는 이들 가족을 주의회 의사당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매니토바주 정부를 대표하여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사과한다. 정당한 유산, 문화, 정체성, 가족을 오랫동안 박탈한 것에 대해서도 속죄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 가족에게 재정적 보상을 약속하고 매니토바주의 다른 병원에서 유사 사례가 발생하지 않았는지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진실을 알게 된 뒤 보베와 앰브로스는 각자 길러준 가족을 소개하고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앰브로스와 그의 딸은 원주민 혈통을 인정받아 메티스 연맹에 가입했다. 보베는 자신의 친동생을 비롯한 본래 친척들과 만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보베는 “비록 메티스로 살아오면서 많은 차별과 괄시에 시달렸지만, 앞으로도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내려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한 “내가 원주민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이제 나를 원주민 혈통이라고 소개하고 다닐 수는 없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언제나 메티스일 것”이라고 전했다.

천양우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