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은 미국 이민 후에 겪은 일이다. 당시에 이탈리아계 유대인 패션 회사에서 Pattern maker로 일을 하고 있을 때인데, 거기는 순전히 지역이라 그 흔한 맥도널드 하나 없었다.
나는 늘 맨 몸이었다. 자동차 열쇠는 물론 아파트 열쇠, 심지어 운전 면허증이나 사회 보장 카드, 돈 한 푼 없이 그야말로 몸뚱이 하나로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그의 주장인즉, 자기가 출퇴근을 시켜 주는데 그딴 것이 뭐가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평생 싸우지 않았다. 사이가 남달라서가 아니라 싸울 수조차 없는 사람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나를 더 지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부가 싸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만나서 같이 살아가는 길에 어찌 다른 의견이 없으랴. 그러나 나는 내가 그로부터 도망을 가거나 죽게 되지 않는 이상 싸우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흰 것을 까맣다고 주장을 해도 무조건 자기 말이 옳은 것이라고 악을 쓰는 그를, 아예 접어놓기로 작정을 했으니까. 싸운다 한들, 백이면 백 판정패를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도 한몫했다. 그와 그의 어머니, 누이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적진에서 행여라도 내가 이길 확률은 전혀 없었다.
이래서 누구나 자기편이 필요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오빠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언니만 둘이고 여자 동생 둘에다가 어린 남동생이 둘, 엄마는 아픈 환자였고 그나마 일찍 돌아가셔서 말 한마디라도 거들어 줄 내 편은 없었다. 더하여 나는 두 아이의 엄마였고, 그 애들의 아비며 할미인 그들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기에 입을 닫고, 마음을 접고, 매일 하늘을 바라보고 살았다.
돌이켜 보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때 우리는 중고차 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만일 중간에 차가 고장 나거나 사고가 날 경우, 나는 완전 빈 몸 하나로 모든 위험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다. 미국 회사들은 퇴근 시간이 되면 사장과 직원들이 일제히 퇴근하고 건물을 닫아걸어 버린다. 낯선 도시 외곽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잽싸게 떠나 버렸는데, 나는 그냥 회사 건물 밖에 혼자 서 있게 되었다. 내 주위가 적막해진 그때, 한 트럭이 와서 멈춰 서더니 내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마치 쥐를 잡아먹으려는 고양이처럼. 아마도 나를 겨눠보고 있었겠지만 나는 절대로 고개를 돌려서 그가 누구인지 보지 않았다. 공연히 시선이 부딪치고 말을 섞다가 납치라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서 있는 곳은 대한민국이 아니었고, 넓디넓은 미국의 땅 어느 한적한 변두리였다.
나는 그저 꼿꼿하게 서서 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하나님, 저를 지켜 주실 줄을 믿습니다. 저를 데리러 오는 그의 차가 무사하게 속히 도착하게 해 주세요. 저 트럭의 사람이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한참이나 나를 그렇게 빙글빙글 맴돌던 트럭이 떠나 버렸다. 아마도 그 트럭운전자는 히스패닉계 사람일 것이었다. 대부분의 패션 회사마다, 운영진들을 제외하면 98%가 남미계통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고도 얼마가 더 지난 후, 그가 드디어 도착했고 나는 내 인생의 구심점인 내 새끼들 곁으로 무사히 복귀할 수가 있었다. 그 날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편 25:21)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구들에게 저녁을 해 먹이고 치운 후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향해 가고 있었다. 겨울은 아니었지만, 겨울로 가는 길목이었던지 길이 꽤 어둑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교회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나와 2~3분 가다가 큰 길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다시 2~3분을 가면 Vermont Street가 나오고 거기서 길을 건너면 바로 우리 교회 나성순복음 교회였으니까.
우리가 사는 동네 역시 히스패닉계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의 서남부 지역에는 남미계가 무척 많다. 더구나 비교적 가격이 싼 아파트 동네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내 아파트를 나와 1분 반 정도 걸어가고 있을 때, 내 앞으로 웬 키가 큰 남자가 지나갔다. 그런데 그가 가다가 뒤돌아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뒤통수에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내가 돌아보기가 무섭게 길거리에서 자동차를 고치고 있는 내 맞은편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나가야 할, 앞길에서 자동차를 수리하고 있던 남미계 남자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번쩍 쳐들고 눈을 번쩍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곧 행동을 취할 것이 느껴져서 나는 순간적으로 차가 붐비고 있는 자동차 길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붙잡힐 바에야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향해서 눈을 번쩍이며 몸을 날리려던 그 남자가 갑자기 찻길로 뛰어든 나를 보고 놀라서 어벙벙거리고 있을 때, 나는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들 사이를 대각선으로 헤치고 길을 건너서 잽싸게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교회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아무도 온 사람이 없어 불이 켜져 있지 않은 캄캄한 성전. 불을 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의자들을 손으로 더듬으며 중간으로 걸어 들어가 앉아 있는데, 극심한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곳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편 46:1)
교회에서 학생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교회 행정 사무실이 바로 교회 정문 입구에 있었기에 얼른 문으로 가서 Door eye(문짝에 뚫어 놓은 구멍)로 밖을 내다보니, 웬 덩치가 큰 남자와 반대로 체구가 작고 귀걸이를 한 동남아 계통의 남자 둘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지 않은 채로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전기검사를 하러 왔다고 그들이 대답했다. 교회에 나 혼자밖에 없었으므로 여전히 문이 닫힌 채로 나중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와 교회관리를 하시는 집사님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말하니, 관리 집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인즉, 오늘은 토요일이라 전기검사를 하러 나올 일도 없고, 만약에 온다고 해도 미리 통보하고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얼마가 지난 후, 다시 누군가 문을 두드리길래 밖을 내다보니 아까 왔었던 그 사람들이었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문을 내 등에 붙이고 선 채로 그들에게 나아갔다. 우리 교회가 Vermont 1가 사거리에 있어서 사람과 차들이 많이 다니고 있으므로.
그들은 내게 전기검사를 하러 왔으니 지하실로 안내를 하라고 했다. “지하실? 우리 교회에 지하실은 없는데. 그리고 오려면 미리 연락하고 와야지.” <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