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 누군가는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깊은 잠에 빠져있을 시간. 아직도 하루를 끝내지 못한 A씨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겨우 퇴근을 하고 귀가하는 길이었죠. 공원을 가로지르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형체가 있었습니다. 벤치에 앉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잠에 들어있는 한 여학생이었습니다. 걱정은 되는데, 여학생이 놀랄까 봐 함부로 다가갈 수는 없고…. A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합니다.
A씨는 일단 직선으로 걷는 대신, 멀리 돌아 여학생을 지나쳤습니다. 갑작스레 인기척이 느껴지면 여학생이 깜짝 놀라며 깨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죠. 이후 곧장 112에 신고해 상황을 알렸습니다. 늦은 밤 인적이 드문 공원의 벤치에 잠든 여학생을 홀로 두고 가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A씨는 여학생과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경찰들을 학생이 있는 장소까지 안내한 뒤 집으로 돌아왔죠. 시간을 보니 어느새 날이 바뀌어 21일 오전 1시쯤. 어딘가 모르게 착잡한 기분이 들었던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해 “얼굴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지만 이 시간에 저렇게 있는 게 안쓰러워 보인다”고 썼습니다.
A씨의 글은 짧지만 네티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수많은 댓글이 달렸죠. “왜 저기에 누워있었을까. 신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슷한 또래 딸아이 부모로서 제가 다 감사합니다.” “귀찮을 만도 한데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일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다 감사합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A씨 덕분에 안전해진 것은 여학생인데, 많은 네티즌이 입을 모아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는 비슷한 딸을 가진 부모로서, 다른 누군가는 관심을 가져줘서, 또 다른 누군가는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적었습니다.
이들은 A씨의 글을 읽으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발을 동동 굴렀을 겁니다. 이 글의 결말을 걱정하며 말이죠. 사진 너머에 있을 여학생의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마지막 줄을 읽었을 이들을 상상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아직은 타인의 안전을 걱정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그걸 지켜보며 안심하고, 함께 감사해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요.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