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극심한 경제난을 초자유주의 시장경제 정책으로 돌파하려는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100일을 넘긴 임기 초반부터 쉬지 않고 개혁의 페달을 밟았다.
대권주자 시절 전기톱을 들고 “썩은 병폐를 도려내 19세기 말 아르헨티나의 번영을 되찾겠다”던 그는 지난해 12월 10일(현지시간)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정부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기존 18개였던 부처를 9개로 줄였고 공공 일자리 5만개를 삭감했으며 에너지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법정통화인 페소화를 50% 수준으로 평가절하한 것도 그였다. 집권 100일째였던 지난 18일도 되기 전에 한 일들이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개혁은 모두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집권 자유당이 하원 의석의 15%만 차지한 여소야대 정국에서 수많은 개혁안은 좌초될 위기에 놓였고, 계속되는 생활고에서 높아진 국민적 저항은 노조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밀레이 대통령은 “1㎜만큼도 양보할 수 없다”며 개혁 강행 의지를 꺾지 않았다.
더 가난해진 직장인… 평균 임금, 빈곤선 하회
밀레이 대통령이 직면한 최대 위기는 빈곤율 증가다. 노동자 평균 임금은 이미 빈곤선 밑으로 떨어졌다. 2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통계청 자료와 현지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1월 기준 노동자 평균 임금은 55만4269페소다. 기본 생필품 구입비인 59만6823페소에 이르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기본 생필품 구입비의 기준은 4인 가족의 1개월 생필품 총지출이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평균 수준의 급여소득자는 자신을 포함한 가족 4명을 부양할 수 없다.
아르헨티나카톨릭대(UCA) 산하 사회부채관측소(이하 관측소)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빈곤율이 지난해 12월 49.5%에서 지난 1월 57.4%로 상승했다”고 밝혔다. 빈곤율은 밀레이 대통령의 집권 1개월 만에 7.9% 포인트나 급등했다.
관측소는 “밀레이 정부의 첫 2개월간 아르헨티나의 구매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관찰됐다. (전체 4600만명인) 국민 가운데 2700만명은 빈곤에 놓인 것으로 추정된다”며 “고용·소득 침체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 조처가 나오지 않은 결과로 분석된다. 앞으로 수개월간 상황은 더 악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관측소는 빈곤율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 페소화의 50% 이상 평가절하를 지목했다. 페소화 가치 하락으로 식료품을 포함한 소비자물가가 전반적으로 상승해 빈곤율을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아구스틴 살비아 관측소 이사는 “지난 1월 빈곤율은 2004년 54.8%를 기록한 뒤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숫자”라며 “인플레이션을 빠르게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적 재앙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성과도 있는 ‘개혁 100일’… 지지율에 달렸다
밀레이 대통령의 ‘개혁 100일’에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전월 대비 물가상승률은 지난 1월 20.6%, 2월 13.2%로 점차 둔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상승률은 지난해 12월의 25.5%에서 2개월 만에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다만 2월 물가의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은 276.2%로 여전히 높았다. 밀레이 대통령은 2월 물가지표에서 연간보다 월간 상승률을 앞세워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대대적으로 시행한 정부 구조조정은 지난 1~2월의 연속 재정 흑자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에서 2개월 연속 재정 흑자는 10여년 만의 일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런 아르헨티나에 대해 440억 달러 규모의 신용 프로그램 제공을 승인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19일 “밀레이 대통령은 험난했던 100일 이후에도 시장경제를 믿고 있다. 아르헨티나인들도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며 “그는 의회에서 부족한 지지를 받아도 국민적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2025년 총선까지 인기를 유지하면 영향력을 극적으로 강화할 수 있지만, 이미 심각한 고통을 겪는 국민에게서 예상보다 빠르게 외면당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 매체 ‘파히나12’는 지난달 25일 “여론조사에서 밀레이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는 54%로, 긍정 평가 46%를 추월했다. 취임 직후 긍정 평가는 61%였다”며 “1983년 이후 집권 100일 전에 긍정 평가에서 15%포인트를 잃은 대통령은 밀레이뿐”이라고 보도했다.
밀레이 대통령이 의회와 소통하지 않고 밀어붙인 여러 개혁안은 공수표로 남을 위기에 놓였다. 밀레이 대통령은 총 366개 조항의 개혁 조치를 담은 ‘메가 대통령령’과 총 664개 조항으로 이뤄진 일명 ‘옴니버스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상·하원에서 모두 통과되지 않았다. 옴니버스 법안에서 300여개 조항이 삭제됐지만 하원에서 개별 심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메가 대통령령은 상원에서 계류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밀레이 대통령의 운명은 불확실한 2가지에 달렸다. 하나는 국민이 경제적 고통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 나머지 하나는 그의 개혁이 정치적 지지를 빠르게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라며 “아직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지율이 하락하면 경쟁자들은 그의 계획에 ‘전기톱’을 휘두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