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사상 최초로 국내에서 열리는 메이저리그 개막전에 시구자로 나섰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역대 아시아인 빅리거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동양 야구의 달라진 위상에 감탄했다.
박찬호는 20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2024시즌 개막전에 앞서 기자회견에 임했다. 은회색 양복 상의에 자주색 넥타이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영어로 외신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한국어로 본격적인 소회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나 뜻깊은 하루”라며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30년 전엔 그 뒤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94년 120만 달러를 받고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의 빅리거로서 MLB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996년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뒀고 단기간에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1997~2001년 5년 연속 10승을 올리며 전성기를 구가한 그는 2010년 은퇴할 때까지 17년 동안 통산 124승(98패)을 수확했다. 이는 아시아 투수 최다승으로, 14년이 지난 현재도 깨지지 않은 대기록이다.
종전 기록은 몸을 비트는 특유의 ‘토네이도’ 투구 동작으로 유명했던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의 123승이었다. 다저스 시절 노모와 한솥밥을 먹었던 박찬호는 옛 동료를 향해 존경을 표했다. 그는 “30년 전 (아시아인으론) 혼자였던 제가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고 이듬해 노모 선수가 왔다”며 “(빅리그에서) 동양의 문을 활짝 열었다”고 평가했다. 선수 경력 막바지 자신에게 노모의 존재가 동기를 부여해줬다고도 강조했다.
이번 비시즌 메이저리그에선 유독 많은 아시아 선수들이 화제를 몰고 다녔다. 오타니 쇼헤이와 김하성, 다르빗슈 유 같은 기존 스타들은 물론 이정후와 야마모토 요시노부, 고우석과 마쓰이 유키 등이 새로 태평양을 건넜다. 다저스와 샌디에이고의 이날 개막 로스터에만 5명의 아시아 선수가 포함됐다. 스즈키 이치로와 추신수를 비롯한 역대 동양인 빅리거를 한 명 한 명 거론한 박찬호는 “노모의 나무, 박찬호의 나무가 정말 튼튼하게 자랐구나 싶다”고 감격했다.
박찬호는 공교롭게도 이날 맞붙는 두 팀에서 모두 현역 생활을 경험한 바 있다. 현재는 샌디에이고 특별 고문으로 재직 중이기도 하다. 다저스를 금융위기 시절 한국인들에게 기쁨을 줬던 ‘첫사랑’에 빗댄 그는 “오늘 경기에서 특정 팀이 이기길 바라진 않는다”며 “한국 팬들에게 최고 수준의 경기를 보여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회견장에서 롤링스(Rawlings)사의 갈색 글러브를 들어 보인 박찬호는 “30년 전 썼던 글러브”라며 “의미 있는 시구에 사용하려고 박물관에서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토미 라소다 당시 다저스 감독으로부터 데뷔전 첫 삼진 공을 선물 받은 뒤 각종 용품을 소중히 보관하는 습관이 생겼다고도 덧붙였다. 박찬호는 “보기엔 좀 흉해도 가치 있는 물건”이라며 “30년 뒤 다시 쓰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후배 김하성을 향한 응원도 잊지 않았다. 진출 첫해 부침을 겪었던 김하성이 해를 거듭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한 데 대해 흐뭇함을 드러냈다. 박찬호는 “최근 파드리스 회식 자리에서 김하성이 동료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는 모습을 봤다. 30년 전 저는 감히 흉내도 못 낸 일”이라며 “선배로서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미소 지었다.
송경모 기자 ss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