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고는 내 수호신”… ‘반려돌’ 키우는 한국인들

입력 2024-03-19 18:54
이주은(18)씨가 지난해 5월 재학 중인 학교 교실에서 반려돌 '주석이'의 팬미팅을 열었다. 이주은씨 제공

“주석이 덕분에 불안했던 수험생활을 잘 버틸 수 있었어요.”

주석이는 지난해부터 이주은(18)씨가 ‘키우는’ 돌멩이의 이름이다. 그가 돌멩이를 돌보기 시작한 건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받으면서부터다. 처음엔 재미 삼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애정이 생겼다. 당시 고3 수험생활을 보내고 있던 이씨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힘든 얘기를 돌멩이에게 털어놓으며 정서적으로 힘들었던 일들을 극복했다고 한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한국에서 작은 돌을 반려동물처럼 키우는 ‘반려돌’이 유행하고 있다고 지난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기사는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 시간을 견디는 한국인들이 ‘독특한 방법’으로 피로를 풀고 있다며 반려돌 키우기 현상을 설명했다.

인스타그램에 '반려돌'을 검색하면 사진과 같은 해시태그를 볼 수 있다. 인스타그램 캡처

실제 인스타그램 검색창에 ‘반려돌’을 검색하면 ‘#반려돌키우기’, ‘#반려돌물’, ‘#반려돌스타그램’과 같은 해시태그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반려돌’ 해시태그를 활용한 게시물은 1000개가 넘는다.

이 같은 반려돌 키우기 현상이 유행하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마땅히 없는 현실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회사 업무나 학업 등으로 힘들어도 마땅히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을 상대가 없는 이들이 돌멩이와 교감하며 안정감을 얻는 것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예고편의 한 장면. 유튜브 'A24' 캡처.

김근아(29)씨가 지난해부터 키우는 반려돌 '휴고'. 돌멩이에 눈알 스티커를 붙이고, 모자도 씌워줬다. 김근아씨 제공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영감을 받아 돌멩이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김근아(29)씨는 반려돌 ‘휴고’를 수호신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과 일어난 후 휴고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는다고 했다. 김씨는 19일 국민일보에 “거친 듯 반들반들한 돌의 머리를 만지는 게 묘하게 교감하는 기분이 든다”며 “나를 지켜보는 존재가 생긴 것 같아 따뜻하고 보호받는 듯한 감정을 느낀다”고 전했다.

지난해부터 반려돌을 키우고 있는 정지은(30)씨도 돌멩이를 키우게 된 이유로 ‘힐링’을 언급했다. 그는 “돌이 자연물이고 모양이 동그랗기 때문에 정원에 있는 느낌을 준다”며 “형태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힐링이 된다”고 말했다.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 멤버 휴닝카이가 지난해 10월 투바투 공식 틱톡 계정에 자신의 반려돌과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게시했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 틱톡 캡처

WSJ는 한국에서 반려돌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2021년 투모로우바이투게더(투바투)·세븐틴 등 유명 아이돌들이 SNS를 통해 본인들이 돌보는 반려돌을 소개하면서부터라고 전했다. 투바투 멤버 휴닝카이는 지난해 10월 투바투 공식 틱톡 계정에 반려돌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해당 영상에 달린 ‘좋아요’ 수는 약 43만개에 달한다.

돌멩이를 키우는 현상이 한국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1975년 미국에서도 작은 돌을 상자에 담아 선물처럼 판매하는 ‘펫락(Pet Rock)’이 유행했다. 다만 당시 미국에서 장난을 치려는 의도로 돌을 선물했던 것과 달리 현재 한국에서는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돌멩이를 활용하고 있다고 WSJ는 짚었다.

고려대 한국학 연구소 김진국 교수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자연물을 닮은 장식용 돌 ‘수석’이 수 세기 동안 사랑받아왔다며 “돌들은 변하지 않으며, 이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준다”고 설명했다.

황민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