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요” 지시하던 글로벌기업 임원서 월급 60만원 ‘인턴’으로

입력 2024-03-14 17:19 수정 2024-03-17 20:18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중장년 인턴십 사업에 참여한 진현주씨가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토글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웅 기자

20년간 칠레에서 직장 생활을 한 진현주(57)씨는 지난해 6월 국내 한 스타트업 회사에 취직했다. 계약 기간 3개월에 월급 60만원 남짓인 ‘파트타임 인턴’ 자리였다. 글로벌기업 임원에서 스타트업 최말단이 된 그는 20년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젊은 대표 신민정씨와 함께 일하고 있다.

14일 서울 영등포구 원어민 튜터 매칭 플랫폼 운영사 ‘토글’ 사무실에서 만난 진씨는 “작은아들 직급이 나보다 높다”며 웃어 보였다. 활력을 찾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는 그는 “인턴이라는 데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일할 기회에 인턴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진씨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운영하는 중장년층 재취업 지원 사업 ‘4050인턴십’에 참여해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

진씨는 대표 신씨를 만난 자리에서 다문화 구성원들의 사회 정착을 지원한다는 회사 설립 취지를 들었고, 최대한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인턴십 근무 시간은 월 57시간이었지만 진씨는 이를 넘기기 일쑤였다. 그는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회사에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눈에 보였다. 인턴이라고 잠깐 앉아있다 간다기보다 일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중장년 인턴십 사업에 참여한 진현주씨가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토글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웅 기자

물론 진씨가 인턴으로 적응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글로벌기업 비서실장으로 프로젝트를 지휘·조율하는 업무를 해왔던 진씨는 ‘하세요’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었다. 이를 ‘해주세요’로 바꾸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진씨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건 노력으로 되는데,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건 각성이 필요하다”며 “끊임없이 ‘여기는 칠레가 아니야, 정신 차려’를 되뇌어야 했다”고 털어놨다.

진씨는 3개월간의 인턴십이 끝나고 ‘전문위원’으로 채용됐다. 신씨가 먼저 계속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신씨는 “스타트업에는 젊은 사람들이 일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경험 있는 분들이 많이 필요하다. 그 부분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는데 ‘시니어 인턴’인 진씨를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중장년 인턴십 사업에 참여한 진현주씨가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토글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윤웅 기자

진씨 사례처럼 ‘지혜를 채용하라’는 문구를 앞세워 2019년 시작한 4050인턴십 사업은 중장년 세대의 재취업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3년간 1044명이 참여해 52%가량의 중장년이 새 일을 찾았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관계자는 “이미 초고령화 사회에 돌입한 일본에서는 우리 측에 ‘정년을 늘리면 되지, 왜 중장년 재취업을 지원하느냐’고 한다. 다만 사실상 정년 연장은 사회적으로 큰 과제다 보니 이른 퇴직을 한 이들이 직업 전환을 하거나 역량을 키워 이직하는 걸 지원하는 사업이 중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프로그램 참여자 상당수는 가족에게조차 인턴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른 퇴직은 사회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현상이지만 여전히 이를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위축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탓이다. 우수사례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퇴직 후 채용설명회를 찾았다는 사실을 주위에 알리기 싫어 상을 거절한 경우도 있었다.

진씨는 “우리 나이에 내 일이 있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일을 그만두는 순간부터 사람은 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젊은 사람들이 채우지 못하는 부분을 시니어가 메우면서 공생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며 “나중에 다리가 흔들리면 일을 쉬어야겠지만 아직은 튼튼하다”고 말했다.

정신영 기자 spiri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