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어, 완벽해’… 갓생의 늪에 빠진 청년들

입력 2024-03-07 00:02
오늘유정 인스타그램, 리브나운 인스타그램 캡처.

2024년 목표로 ‘갓생 살기’를 다짐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각종 SNS에 성취를 인증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한편에선 바쁜 삶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불편함을 토로하고 있다. 일부 청년들은 남을 의식해 유행에 따라가기 보다는 각자를 위한 삶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오운완’ 올리고 스터디 인증하고…갓생러의 하루

오전 6시, 취준생 이서현(24)씨와 기상스터디 채팅방 속 학생들은 줄줄이 기상 사진을 인증하며 미라클 모닝의 성공을 알렸다. 미라클 모닝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운동·공부 등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갓생’ 습관이다. 신을 뜻하는 ‘갓(God)’과 인생을 뜻하는 ‘생’(生)을 합친 ‘갓생’은 남들에게 모범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의미한다.

이씨는 외출 전 공부 시간을 확보하고자 기상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기상스터디에 참여하면 하루 시간을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쓸 수 있다.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어 동기 부여도 된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모(23)씨가 사용하는 일정 관리 앱, 학회를 위해 만든 공부 자료. 김지혜 인턴기자

같은 시각, 대학생 이모(23)씨는 휴대전화 앱으로 할 일 목록을 확인하며 길을 나섰다. 운동, 학회와 동아리 등으로 빼곡히 채워진 하루는 새벽 1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앱을 통해 일과를 공유하는 그와 지인들은 완료 표시가 남은 계획표에 ‘좋아요’를 누르며 서로를 격려했다. 이씨는 “나를 성장시킬 경험이라 생각하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모씨가 매일 관심 산업 뉴스를 아카이빙하는 SNS 피드, 이모씨의 운동 인증사진. 김지혜 인턴기자

갓생러들은 “기록이 모여 내가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작은 루틴을 성취한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매일 시간 인증앱을 이용해 운동 인증샷을 올리고 있다는 김모(23)씨는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게시글들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낀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과정을 스스로 지켜보고 성실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웃음지었다.

취준생 이모(24)씨는 취업 준비를 위한 루틴을 만들었다. 이씨는 매일 채용 플랫폼을 분석하고 꾸준히 관심 산업 뉴스를 SNS에 아카이빙하고 있다. 그는 “매일 루틴을 실천하며 나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과정이 즐겁다”이라고 말했다.

“왜 열심히 살라 강요하죠?” 불만도

모두가 갓생을 원하는 건 아니다. 콘텐츠에서 소개되는 갓생의 정형화된 이미지에 반감을 가지는 청년들도 있다.

대학생 김모(26)씨는 유튜브에서 갓생 콘텐츠를 보면 거부감을 넘어 이질감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미디어에 비치는 갓생은 하루를 바쁘게 보내는 데만 집중하는 듯 보인다”며 “스스로를 ‘갓생러(갓생을 사는 사람)’라 칭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뽐내려는 것 같다”고 전했다.

김씨는 갓생 열풍이 청년들에게 불필요한 위기감을 심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갓생 브이로그를 보다 보면 다른 사람의 멋져 보이는 일상에 환상을 가지며 그런 삶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유튜브 댓글 갈무리

실제로 유튜브에서 갓생 관련 영상의 댓글을 보면 영상 속 유튜버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책하는 반응이 많다. 주로 “영상을 보니 아무것도 안 하는 내가 부끄러워진다”거나 “게으른 나를 반성하고 간다”는 식이다.

직장인 정모(27)씨는 ‘갓생’이라는 단어에 부담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바람직한 삶의 형태를 하나로 정해놓고 그렇게 살아야만 ‘갓’, 즉 ‘제일 좋은 삶’이라며 찬양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안 그래도 피곤한 삶…‘갓생’ 대신 ‘굿생’ 삽시다

직장생활 30년 차 배모(52)씨는 퇴근 후에도 갓생을 위해 노력하는 청년들의 삶을 목격했다. 배씨는 “젊은이들이 열심히 사는 건 좋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바빠 보일 때가 있다”며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을 위한 갓생을 살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리브나운 인스타그램 캡처

자신을 위한 갓생이란 뭘까. 2년 차 자기계발 인플루언서이자 대학생 최나운(23)씨는 갓생을 ‘내가 있는 삶’으로 정의했다. 그는 자신 또한 갓생에 도전했다가 수없이 실패했다고 털어놨다. 최씨는 “갓생의 과정에 내가 없고 삶의 기준점을 내 안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가 그런 삶을 지속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엿한 인플루언서가 된 최씨의 목표는 욜로도, 갓생도 아닌 ‘굿(good)생’이다. 각종 대외활동과 콘텐츠 제작으로 바쁘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들로 삶을 채워가고 있다. 최씨는 “갓생이란 현재와 미래 모두를 버리지 않고 ‘자기’가 남는 자기개발을 하는 삶”이라며 ‘열심히’의 목표와 기준을 남에게 두지 말라 당부했다.

오늘유정 인스타그램 캡처

갓생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유정(24)씨 역시 “타인의 기준에 맞추지 말고 스스로 만족하는 하루를 보냈다면 그게 갓생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는 어제의 자신보다 나아진 오늘이 쌓이면 큰 성과로 돌아온다고 믿는다. 그의 활동명이 ‘오늘유정’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병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갓생을 ‘청년들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어라 평가했다. 이교수는 “자기개발 열풍은 이전부터 있었다. 삶의 형태에 옳고 그름은 없으니 부담 갖진 말았으면 한다”고 제언했다.

김지혜·정고운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