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죽음도 바꿀 수 없는 이름, 크리스천

입력 2024-03-04 05:55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3월 첫 월요일입니다. 자녀가 있는 집은 오늘 좀 바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일제히 새 학기가 시작됐지요. 저희 둘째 아이는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인데요. 학교 갈 생각에 어제부터 근심이 가득한 눈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 엄마는 엊저녁 삼겹살을 잔뜩 구워주면서 아이에게 힘을 보탰습니다. 덕분에 아이는 오늘 아침 씩씩하게(?) 잘 등교했습니다. 기도하기는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고 기쁘게 학교생활을 잘하기를 바래봅니다. 부모님들께도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긴 겨울방학 동안 아이들과 함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는 박해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까지 기독교인들은 대략 300년간 박해를 받았습니다. 모든 황제가 기독교인을 핍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황제들은 심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는 지금으로 말하면 ‘너무 튀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진 신앙 자체는 사회나 국가를 전복시킬 만큼의 범죄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 사회에서 기독교인들만 제국의 신들을 예배하지 않거나 통일을 거부할 때 처벌을 받았습니다. 황제 또한 신으로 추앙을 받던 시절이었고 이들은 로마의 하나 됨을 위해 태양 등 자연을 숭배하도록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로마는 이렇게 기독교인을 핍박하면서 크리스천을 없애려 했지만 종국엔 기독교로 제국 전체가 전복당하며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크리스천이란 이름은 이렇게 약하면서도 권세가 있는 이름입니다. 이 예수의 이름은 결국 온 세상에 증거되고 전파될 것이며 그제야 끝이 올 것입니다.(마 24:14)

현재의 고통은 천국의 기쁨
22세 기독교인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노예 펠리시티타스, 그리고 다른 여러 명이 로마제국 카르타고의 원형경기장에서 203년 3월 7일 사망했습니다. 이들은 채찍질과 굶주린 표범의 공격을 받은 후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유명한 순교자 중 한 명입니다.

서기 202년은 기독교 박해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시절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해에 초기교회 변증가이자 신학자인 이레나이우스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의 제자였습니다. 또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대표하는 신학자이자 성경주석 학자인 오리게네스(일명 오리겐)의 아버지를 비롯한 일단의 기독교 신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때는 로마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3세기 초 약화한 제국의 내란을 평정하면서 제국 내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태양이 지존의 신임을 인정하면 모든 다른 신들을 허용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태양숭배를 거부했고 이들을 겨냥한 박해와 공격은 극심했습니다.

로마 귀족 가문의 딸이었던 페르페투아도 바로 그 시절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돼 투옥됐습니다. 그녀와 함께 붙잡힌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합니다. 10대의 젊은이들도 섞여 있었던 이들은 모두 5명으로 황제의 칙령을 어겼다는 혐의로 고발됐습니다.

부친은 여러 차례 그녀를 찾아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것을 애원했지만 페르페투아는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했다고 합니다. 페르페투아는 “꽃병을 꽃병이라고 부르듯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당하는 나의 고통은 천국을 위한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

원형 경기장 맹수 앞에서도 이들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환한 얼굴로 기쁘게 경기장에 등장했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표범이나 곰 등 맹수의 공격을 받았고 여자들은 야생 젖소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소에 받혀 땅에 쓰러진 페르페투아는 여기저기 찢긴 몸으로 자기의 머리를 다시 묶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풀어진 것은 슬픔과 애도의 상징인데 이날은 생애에 있어서 가장 기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쓰러진 자신의 노예 펠리시티타스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을 굳게 지키세요. 서로 사랑하세요.” 이들은 한곳에 모였고 입맞춤을 나눈 뒤 사형집행인에 의해 숨을 거뒀습니다.


페르페투아의 순교 이야기는 이후 신자들에게 알려지면서 믿음의 결단을 더 강화했습니다. 히브리서는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11:35)라고 말씀합니다.

이성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다
1274년 3월 7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48세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중에서 유물론적 요소를 제거하고 관념론적 요소인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제1 원리로서의 신이라는 관념 등을 차용해 기독교에 적용했습니다. 피동체는 반드시 이를 움직인 동인이 있어야 하므로 결국 최초의 동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바로 이 최초의 동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데 있어 이성에 의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는 당시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했던 철학을 신학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전환시켰습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 형성된 기독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키며 이른바 ‘스콜라철학’을 대표합니다. ‘신학대전’은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신학대전'을 들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 카를로 크리벨리, 1476년, 런던 국립미술관.


395년 3월 9일 카파도키아의 아버지이자 주교였던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별세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사상가이자 신학자, 웅변가, 금욕주의자였으며 삼위일체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31년 3월 9일 전도자 찰스 피니가 뉴욕 로체스터에서 6개월간의 집회 시리즈를 마무리합니다. ‘세계 최대의 단일 부흥 운동’으로 불리는 이 집회를 통해 마을의 극장과 선술집이 문을 닫고 범죄가 3분의 2로 감소했으며 10만 명이 회심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회개하다
1748년 3월 10일 노예선의 선장이었던 존 뉴턴이 바다에서 큰 폭풍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탔습니다. 한때 영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뱃사람의 생활에서 밴 무절제한 생활로 견디지 못하고 탈영했습니다. 이후 체포돼 장교 후보생에서 병사로 강등돼 반항, 함장은 그를 아프리카 노예선에 팔아넘겼습니다. 이후 그는 노예 생활을 하게 됐고 15개월간 외딴 섬에서 굶주리며 생활하다 무역선에 의해 구출됐습니다. 그때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다가 불확실한 삶의 지속에 관한 구절에 충격을 받고 회개했습니다.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23세에 노예선 선장으로 변신, 아프리카 흑인을 잡아다 미국에 팔았습니다. 당시엔 노예무역이 합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예선 생활을 했던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6년 만에 청산, 런던으로 돌아와 신학을 공부했고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 등 당대 목회자들의 지도를 받아 영국 올니에서 1764년 목사가 되어 15년간 목회를 했으며 1780년 세인트메리울모스 교회로 파송 받아 평생 목회했습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305장) 이외에도 ‘지난 이레 동안에’(44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210장)를 작사했습니다.

1898년 3월 10일 영국의 자선가이자 전도자인 조지 뮬러가 별세했습니다. 그는 93년 동안 1만명 이상의 영국 고아를 도왔습니다.

검은 모세를 아십니까
1913년 3월 10일 미국 흑인운동가로 수백 명의 흑인 노예를 탈출하도록 도와 ‘검은 모세’라 불렸던 해리엇 터브먼이 별세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잔혹한 노예의 삶을 이어가다가 1849년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돕던 비밀조직망인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의 한 조직원을 만나 탈출에 성공했고 이후 남부를 떠나 북부 필라델피아에서 삶을 이어갔습니다. 자유를 얻은 뒤 도망 노예의 탈출을 돕기 시작했고 이러한 활동 때문에 남부의 농장주들에 의해 현상 수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았고 1850년부터 10여년간 300명이 넘는 흑인들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노예를 구출한 것은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