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에 미친 남자’, 후학 위해 평생 모은 애장품 모교로

입력 2024-03-01 17:33 수정 2024-03-01 17:36
정성구(왼쪽 첫 번째) 박사가 1일 서울 동작구 총신대 백남조홀에서 총신대에 칼빈 박물관 사료를 기증했다. 오른쪽부터 박성규 총신대 총장 오정호 예장합동 총회장 화종부 총신대 이사장.

평생 모은 애장품을 모교에 기증한 학자가 아내에게 진실을 털어놓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여보. 내가 1만 원 주고 샀다던 그 자료, 사실 1만불짜리였어요. 미안합니다.” 총신대 전 총장이자 한국칼빈주의연구원 원장인 정성구(81) 박사는 1일 서울 동작구 총신대 백남조홀에서 칼빈박물관 사료 기증식에서 이같이 밝혔다.

정 박사는 1985년 경기도 성남에 한국칼빈주의연구원을 세우고 국제 학술교류와 칼빈주의 신학 및 신앙 운동 발전에 힘써왔다. 이번에 기증하기로 한 사료는 정 박사가 연구원 지하 칼빈박물관에 보존해오던 것들이다. 개수만 수백점에 달한다.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 아람어와 헬라어로 적힌 파피루스 성경이다.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파피루스 연구소에 등록된 사료를 정 박사가 현지에서 공수했다. 이밖에 17세기 교부들의 저서, 16~17세기 칼빈이 작성한 자료 원본 30점, 1621년 쓰인 돌트총회 회의록 등이 포함됐다. 국내 자료도 적지 않다. 한국 장로교회 신학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박형룡 박윤선 박사의 논문과 강의 노트, 편지, 육성 테이프도 이번에 기증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라틴어판(1553년). 칼빈박물관 제공

국민일보와 만난 정 박사는 “35년 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개정판을 사고는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물 한 병과 바게트 하나로 하루를 버텼던 기억이 난다”고 일화를 전했다. 가장 아끼는 자료로는 ‘폴리갑에서 어거스틴까지’ 이르는 1600년대 교부들의 저서 원본 50점을 꼽았다. 그는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신학을 후배들에게 배턴터치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전 세계를 돌며 개혁주의, 특별히 칼빈과 칼빈주의 관련 사료를 모으기 시작했다”며 “모은 자료가 후학들의 연구에 귀하게 사용되고 우리 대학이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이 되는데 이바지하길 소원한다”고 말했다.

박성규 총신대 총장은 “사료가 워낙 많다 보니 범주만 53종에 달한다”며 “정통개혁주의 교회 역사와 칼빈주의 연구에서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들”이라고 설명했다. 총신대는 현재 칼빈박물관에 있는 사료 이전을 위해 2년 안에 전시 공간을 확보할 방침이다.

정성구 박사가 1일 서울 동작구 총신대 백남조홀에서 사료 기증에 대한 소감을 전하고 있다.

정 박사의 자서전 출판 감사예배를 겸해 열린 행사에는 총신대 전·현직 총장뿐 아니라 학교가 소속된 예장합동 교단의 전·현직 총회장들이 총출동해 눈길을 끌었다. 예장합동 총회장인 오정호 대전 새로남교회 목사는 “정성구 목사님은 평생 강단에서 생명의 말씀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 시대의 스승”이라며 “스승이 남기신 글과 사료, 정신을 계승해 총신이 훌륭한 지도자를 계속 배출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 총회장인 권순웅 주다산교회 목사는 “박사님이 전해주신 사료들은 개혁주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보물”이라고 말했고, 배광식 울산 대암교회 목사는 “학문적 발전뿐 아니라 후학에게 큰 도전과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정호 예장합동 총회장이 1일 서울 동작구 총신대 백남조홀에서 열린 칼빈박물관 사료 기증식 및 자서전 출판 감사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