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외 인공수정을 위해 만들어진 냉동 배아(수정란)를 태아로 봐야 한다는 미국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냉동 배아를 태아로 인정한 법원 판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에서만 난임 부부가 연간 수십만 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체외 인공수정을 시도하다 배아를 폐기할 경우 법적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 낙태반대운동 단체에서는 생명존중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지난 16일 냉동 배아도 태아이며 이를 폐기할 경우 법적 책임이 따른다고 판결했다. 이번 사건은 실수로 다른 부부의 냉동 배아를 떨어뜨린 사람의 행위에 따른 법적 책임을 묻는 판결이었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냉동 배아가 아이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소송을 기각한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다. 판결문에서 “태어나지 않은 배아도 생명”이라며 “냉동 배아도 불법 행위에 따른 미성년자 사망 관련 법에 따라 같은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한다. (배아가) 태어났든 안 태어났든 모든 아이에게 제한 없이 적용된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판결을 내린 톰 파커 앨라배마주 대법원장은 성경을 인용한 보충 설명에서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심지어 출생 이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우지 않고서는 파괴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 50년간 낙태권 보장을 명문화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2022년 폐기된 이후 앨라배마주에서는 전면적인 낙태 금지 조치가 시행 중이다. 이번 판결에 대해 낙태권 지지자를 비롯해 일부 의료계는 체외 인공수정 시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체외 인공수정 시 임신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능한 다수의 배아를 만들어 냉동 보관하는데, 임신에 성공할 경우 배아를 폐기하는 부모나 의료기관이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에서는 낙태권 이슈를 둘러싼 보수·진보 진영이 공세를 펼치며 쟁점화에 나서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신 16주 이후 태아에 대한 낙태 금지’의 전국적인 입법화에 대해 찬성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표명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대통령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복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며 ‘맞불 대응’에 나섰다.
한국 프로라이프계(낙태반대운동)는 이번 판결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문지호 성산생명윤리연구소 부소장은 “무분별하고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시험관 시술에 경종을 울릴 것”이라며 “수정란을 태아의 시작으로 인정한 판결은 생명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드러낸다. 수정된 순간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