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벤처캐피털(VC)이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 유치한 자금의 미집행 규모가 지난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고금리와 경기 침체에 창업 생태계가 악화하면서 VC들이 투자에 신중해졌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미 VC들이 스타트업에 투자하지 않은 자금 규모는 3110억 달러(약 416조2735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VC들은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코로나 팬데믹 기간 투자자들로부터 모두 4350억 달러(약 582조2475억원)를 조달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투자한 규모는 절반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나머지 자금은 ‘드라이 파우더’가 됐다. 드라이 파우더는 VC 등이 투자자로부터 모은 투자금 중 집행하지 않은 자금을 뜻한다.
3000억 달러가 넘는 드라이 파우더가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타트업의 밸류에이션(가치평가) 하락에 투자에 신중해지는 기조가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VC들은 테크(기술) 기업이나 이미 투자를 집행해 포트폴리오에 편입한 기업들에게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FT는 VC들이 신생 기업에 투자하는 모험을 줄이고 현 상황에 맞는 안정적인 투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투자 업계 관계자는 “VC들은 고금리가 길어지며 고위험 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들고 있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봤다.
투자가 감소하자 안 그래도 경영난을 겪는 스타트업들은 자금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이는 특히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신생 기업)이 줄어드는 현상을 자아냈다. 피치북은 지난해 전 세계에서 225개의 유니콘 기업이 등장했는데, 이는 2019년 이후 가장 낮다고 밝혔다. 또 스타트업의 파산 건수는 1년 새 두 배로 증가하기도 했다. 한때 유니콘으로 부상했던 트럭운송기업 ‘콘보이(Convoy)‘와 화상회의 솔루션 개발기업 ‘호핀(Hopin)’은 모두 헐값에 매각되거나 폐업했다.
VC들이 몸을 사리는 이유는 기관투자자, 연기금, 재단 등 유동성 공급자(LP)들로부터 투자금 회수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에 본사를 둔 VC들은 지난해 LP들에게 상환한 자금은 210억 달러(약 28조1085억원)였다. 이는 2021년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VC 업계의 이런 위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투자은행(IB) 에버코어의 사모 투자 부문 책임자인 나이젤 던은 “스타트업들이 느끼는 현금 조달 압박은 그 어느 때보다 크며, 수익성이 가시적으로 담보되지 않아도 투자금이 흐르는 수도꼭지가 계속 열려 있을 거란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라고 봤다.
한명오 기자 myung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