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강남지점 박 대리입니다. 본인 명의로 압류 비용 다시 송금해 주셔야 해요. 제 사원증 사진 하나 보내드릴게요. 빨리 입금하셔야 합니다.”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한 사무실에서 만난 영화 ‘시민덕희’ 실제 주인공 김성자(50)씨는 2016년 1월 보이스피싱 사기범에게 속아 넘어갔던 상황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중년 여성이 끈질긴 추적 끝에 중국에 있던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을 자기 힘으로 잡아낸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지난달 24일 개봉해 3일까지 관객 약 84만명을 모았다.
김씨는 영화 개봉 후 자신에게 안부를 묻는 이들이 늘었다며 8년 가까이 된 고군분투기를 생생히 되짚었다.
당시 김씨는 경기도 화성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홀로 생계를 부양하던 모친의 부담을 덜고자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한 미싱일이 생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평범한 일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건물 주차장에서 4살 아들과 추락 사고를 당한 것이다. 떨어진 장난감을 주우려고 몸을 내밀던 아들이 건물 밑으로 추락하려던 순간 김씨는 몸을 던져 아들을 잡았다.
“다행히 아들은 무사했지만, 저는 이 사고로 온몸에 골절상을 입고 3년간 병원을 들락날락했어요. 당시 안전망을 임의로 치워둔 건물주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걸었죠.”
김씨는 건물주와 장기간 법적 공방을 벌이던 2016년 1월 ‘압류 비용을 내라’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사법기관을 사칭한 사기극이었다. “소송 중 압류 비용이 필요할 수 있단 말을 들었을 때였어요. 마침 보이스피싱범도 법원이니 검찰인 얘기를 해서, 말로만 듣던 압류 비용을 내야 하는 줄 알았죠. 그들이 보내온 가상계좌에 아들 명의로 돈을 이틀에 나눠 이체했어요.”
이튿날 김씨는 또다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본인 명의로 돈을 다시 입금하면 일전의 돈을 바로 돌려주고, 대출도 받게 해주겠다는 취지였다. 그는 지인들에게 급히 돈을 빌려 그날 바로 이체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돈은 돌려받지 못했다.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씨는 한동안 수면제와 술로 나날을 보냈다. 그런 김씨를 붙잡은 건 아들의 눈물이었다. “아들이 나 때문에 엄마가 죽는 거 아니냐며 ‘죽지마, 잘못했어’ 하고 엉엉 울더라고요. 아차 싶었죠. 그날부로 수면제를 전부 버리고 살아야 겠다는 의지를 다잡았어요.”
정신을 차린 김씨는 피해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그런데 경찰은 “아줌마, 중국에서 걸려온 전화여서 (범인은) 못 잡아요”라는 답변을 반복할 뿐이었다. “너무 억울하고 자존심 상해서 도무지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척 보이스피싱 조직에 전화도 걸어보고, 욕설 메일도 엄청 보냈죠.”
이후 김씨는 보이스피싱 총책에 관한 제보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수화기 너머의 남성은 자신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라고 소개하며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너네한테 더 뜯길 돈 없다고 전화를 끊었어요. 근데 전화가 또 오더니 ‘아줌마 이번엔 진짜다. 총책이 설을 쇠러 중국에서 한국으로 잠깐 들어가니 꼭 신고해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김씨는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지만, 경찰은 “아줌마, 또 돈 보냈어요? 그거 다 뻥이야”라며 제보를 무시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럼에도 전화를 한 조직원을 어르고 달래며 총책의 이름과 얼굴이 찍힌 사진, 주소 등 보다 상세한 정보를 얻어냈다. “중국인 지인에게 부탁해 2016년 2월 8일 10시25분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한다는 것까지 알아냈어요. 그제야 경찰도 ‘이제부터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하더군요.”
이후 김씨는 제보 받은 총책의 거주지 앞에서 며칠간 잠복까지 했다. 그런데 2월 8일이 지나도 총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로부터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때 이웃으로부터 말 한마디를 들었다. “언니, 뉴스 봤어? 언니가 쫓던 총책 이미 잡혔다는데?”
영화 ‘시민덕희’는 주인공이 총책을 잡으며 마무리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김씨는 총책 검거 이후에도 외로운 싸움을 이어 가야 했다. 보이스피싱 피해액 3200만원을 돌려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내건 신고 포상금 ‘최대 1억원’ 역시 마찬가지다.
김씨는 돈을 돌려받기 위해 구치소에 수감된 총책을 직접 면회했다. 김씨는 총책을 대면하자 마자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당신 사기죄로 집어넣을 거야”라고 말해줬다. 총책은 보이스피싱 사기로 올린 범죄 수익금을 모두 압류당해 돌려 줄 돈이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당한 사람이 멍청하지 왜 나한테 와서 그러느냐”며 김씨를 비웃기까지 했다.
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7번이나 면회를 가 ‘내 돈 달라’고 했어요. 눈만 뜨면 찾아갔죠.”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또 있었다. 총책이 붙잡히기 전 자신과 같은 처지의 또 다른 보이스피싱 피해자 한 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김씨는 “1200만원 정도를 잃은 피해자가 있었다”며 “그분이 숨졌다는 부고 문자를 받았을 때 슬픔과 분노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그는 총책이 저지른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도록 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재판을 앞둔 총책은 김씨에게 합의를 제안했다. 합의금은 500만원. 그러나 김씨는 이를 거절했다. “(합의를 통해) 하루라도 감형받는 건 용납할 수 없었어요. 재판 이틀 전에는 판사님께 엄벌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죠.” 결국 총책은 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경찰로부터 보이스피싱 신고 포상금을 받고자 했다. 합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경찰은 총책을 붙잡은 이후로도 수개월째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먼저 경찰서에 전화를 거니 “깜빡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제야 (경찰에서) 통장하고 신분증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선심쓰듯 100만원을 주겠대요. 우리 경찰서는 돈이 없어서 원래 이것보다 덜 주는데, 저한테는 특별히 더 주는 것이라고.” 화가난 김씨는 100만원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자신이 당한 일과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는 2016년 7월 한 언론에 출연한 이후 페이스북에 자신의 사연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화계의 관심도 이어졌다. “영화사에서 온 사람이 제 이야기를 서너 시간 들어줬어요. 눈물을 글썽이다 제 손을 몇 번이고 잡아 줬죠. 그러더니 ‘제가 사실 감독인데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어요’라 하더군요.”
이 말을 듣고 김씨는 물었다. “이런 얘기도 영화가 되나요?” 감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 7년여가 흘러 영화 ‘시민덕희’가 만들어졌다.
김씨는 여전히 피해액과 포상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잘 모르겠다”며 “물론 경찰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민원을 넣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고 답했다. 대신 그는 보이스피싱 피해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저는 피해 사실이 알려진 후 ‘멍청해서 당한 거야’라는 비난이 정말 싫었어요. 영화 대사로도 나오듯 보이스피싱에 넘어간 건 절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부디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방유경·이서현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