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미국 사회에는 이런 그의 행동에 거부감이 컸습니다. 백인 사회, 특히 경찰과 검찰은 그가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도록 체포와 구금, 기소를 수시로 했습니다. 보수적이며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백인 중엔 물리적 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 폭탄이 터졌고 흉기를 사용해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새벽 2~3시까지 항의 전화를 걸어 언어폭력을 일삼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이런 공격은 그만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민권 운동을 같이하던 흑인 목회자 등 지도자와 시민들의 희생도 컸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비폭력 저항을 부르짖었고 민주주의와 기독교를 숭상하는 미국 사회에 흑인에 대한 차별은 비민주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에서는 킹 목사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가 목사로서 어떤 준비를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살폈습니다. 그의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따르면 그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견지하면서도 보수 신학으로 균형을 맞추려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민권운동 지도자로 명성을 쌓다 보니 당시 백인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그와 거리가 있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잡지인 크리스채너티투데이(CT)는 1964년 8월호에서 킹 목사의 비폭력 시민 불복종에 대해 “설교자들이 시민 불복종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폭력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을 부추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선언하면서 비판적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반세기 후 CT는 킹 목사와 민권 운동을 반대한 것에 대해 공식 사과했습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에는 수도원 운동의 효시라 부르는 이집트의 수도사 안토니우스 이야기, 그리고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담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알아봤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로교인입니다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항상 읽을 때마다 푸근하고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알고 보니 실제로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1문 1답은 암송하고 싶어지는 구절입니다. 여러분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1929년 1월 15일 | 미국의 마틴 루서 킹 목사 출생 |
356년 1월 17일 | 최초의 수도사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별세 |
1563년 1월 19일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발간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29년 1월 15일 미국에서 가장 눈에 띄는 민권 운동 지도자였던 침례교 목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55년부터 1968년 39세의 나이로 암살당할 때까지 활발하게 흑인 인권의 증진을 위해 힘썼습니다. 오늘의 미국 흑인들의 민권 및 인권 증진은 오랜 투쟁과 저항의 결과입니다. 1865년 12월 6일 노예제는 폐지됐지만 농장이 많았던 남부 주들은 그만큼 반발도 컸습니다. 이후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자동차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대변동이 농장에 분산돼 있던 흑인들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또 농업의 쇠퇴와 공업 발전은 수많은 흑인들을 도시로 끌어냈고 경제적 조건도 향상시켰습니다.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증가함에 따라 흑인들의 인식은 넓어졌고 더 나은 교육 기회를 누리게 됐습니다. 1954년 5월 17일 미 연방법원은 공립학교에서의 흑백분리를 금지했고, 킹 목사를 중심으로 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버스 내 흑백분리법에 대한 비폭력 저항운동은 1956년 11월 13일 연방법원의 위헌 결정을 끌어냈습니다. 이후 킹 목사와 흑인 사회를 향한 폭탄 테러와 공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킹 목사의 부친 이름은 원래 마이클 킹이었으나 1934년 독일을 방문하면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들 부자(父子)는 마틴 루터 킹 ‘시니어’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2세)가 되었습니다.
킹 목사는 모어하우스대학에 입학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을 읽으며 비폭력저항주의를 접했습니다. 선에 협조하는 것뿐 아니라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도 도덕적 의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목사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모어하우스대 학장인 메이즈 박사와 켈시 교수를 통해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무엇보다 부친의 영향력이 커서 숭고한 목회자상과 도덕적 이상형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킹 목사는 펜실베이니아주 크로저신학교에 입학해 사회악을 일소할 방법을 찾기 위해 지적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철학 사회학 윤리학 이론을 진지하게 공부합니다. 특히 월터 라우션부시의 ‘기독교 신앙과 사회적 위기’는 그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쳐 개인의 문제에만 국한된 종교는 사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도 읽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에 매혹되는 이유가 궁금해서였습니다. 그의 결론은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우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공산주의의 윤리적 상대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또 공산주의가 가진 정치적 전제주의에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공산주의에서는 개인은 국가의 부속물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므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근본적으로 사악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반면 빈부격차에 대한 인식,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의 동기가 이윤 추구라는 점을 밝혀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킹 목사는 자본주의가 전파하는 실용적 유물론(인생의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이 인류에 대한 봉사와 인간관계의 질에 두지 않고, 수입 규모나 자동차 크기에 두는 경향)은 공산주의의 유물론만큼이나 해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을 접하면서 그의 비폭력저항주의에 매료됐습니다. 그는 간디가 사랑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개인 간 단순한 상호관계를 넘어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규모 사회적 역량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라인홀드 니버를 통해 현실적 평화주의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주의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판단할 때만 비평화주의에 비해 사악함이 덜한 입장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는 보스턴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을 견지하면서도 자유주의를 교정하기 위한 방책을 신보수주의 신학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나는 청년 시절 이미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에 내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가 인생을 바치려 했던 대상은 오늘 나타났다가 내일 사라져 버리는 하잘것없는 신들이 아니라 어제오늘,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언제나 한결같은 하나님이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보스턴에서 부인 코레타 스콧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첫 목회지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덱스터에비뉴침례교회였습니다. 1954년 10월 공식으로 담임목사가 됩니다. 이듬해 로사 파크스가 버스의 백인전용 좌석 뒷좌석에 앉았다가 백인 남성이 차에 오르자 뒤로 가라는 운전사의 말을 듣지 않아 흑백분리법률 위반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당시 남부는 여전히 흑백 차별이 심했습니다. 몽고메리는 특히 심해서 버스운전사들은 흑인들을 ‘검둥이’ ‘검은 원숭이’ ‘검은 젖소’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흑인들은 ‘버스 타지 말기’ 운동을 전개했고 킹 목사는 몽고메리진보연합 의장으로 선출되며 보이콧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시의회와 경찰, 백인들의 협박과 분열 책동, 폭탄 테러, 검사의 기소 등의 공격을 받았지만 킹 목사와 흑인들은 비폭력 저항으로 난관을 헤쳐나갔고 1년 뒤인 1956년 11월 미 연방최고법원이 버스 내 흑백분리법률은 위헌이라고 선언하며 흑백통합버스 시대를 맞습니다.
킹 목사는 57년 2월 남부지도자협의회 의장이 되었고 워싱턴 DC에서 열린 자유를 위한 순례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57년 9월 리틀락의 센트럴고교의 인종차별을 폐지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공권력을 사용하겠다고 결정합니다. 킹 목사도 이에 지지를 보냅니다.
58년은 그에게 매우 힘든 해였습니다. 경찰의 만행과 불법 체포가 이어졌고 정신분열증을 가진 한 여성이 흉기로 그를 공격하면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이듬해 비폭력운동의 산실인 인도를 순례해 네루 대통령을 만나고 수많은 인도인과 대화했습니다. 60년 애틀랜타로 이주한 그는 런치 카운터 연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버밍햄 시위로 투옥됐습니다. 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새로운 시민권에 대한 제안을 발표했으며 NAACP 지도자인 메드거 에버스가 암살됐습니다. 킹 목사는 케네디 대통령과 만났고 흑인의 고용과 자유 쟁취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시작합니다.
1963년 8월 28일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광장에 25만여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그는 이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구절로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 연설은 미국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서 이사야 40장 4절(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과 아모스 5장 24절(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의 메시지를 반영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버밍햄 식스틴스스트리트침례교회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서 주일학교 흑인 소녀 4명이 사망합니다. 킹 목사는 폭파사고로 죽은 네 아이를 기리는 연설을 합니다. 64년 12월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65년 2월 킹 목사는 앨라배마주 셀머에서 흑인들의 투표권 쟁취를 위한 행진 시위를 했고 투옥됩니다. LA와 시카고에서 운동을 펼쳤고 베트남 전쟁 시기엔 협상에 의한 해결을 촉구하면서 북베트남 폭격 중지를 주장합니다. 그는 67년 4월 뉴욕 리버사이드교회에서 최초의 공식 반전 연설을 했습니다.
1968년 2월 4일, 마틴 루터 킹은 고향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버니저 교회에서 설교했습니다. 자기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이 설교는 그의 마지막 설교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4월 4일 멤피스 로레인호텔에서 암살당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나를 위해 긴 장례를 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긴 조사(弔辭)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또 내가 노벨상 수상자라는 것과 그 밖에 많은 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도 언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날, 마틴 루터 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으며, 전쟁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기 위해 애썼으며, 인간다움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몸 바쳤다는 것이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킹 목사의 묘비엔 그가 자주 인용했던 찬송가 구절이 쓰여 있습니다.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I’m free at last.”(마침내 자유, 마침내 자유다.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하신 전능한 하나님께 감사하라)
미국은 매년 1월 셋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로 정해놓고 킹 목사의 삶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킹 목사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의 서문 위쪽 동상에 그려진 ‘20세기 세계 순교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CT는 14일(현지시간) ‘마틴 루터 킹 데이’를 하루 앞두고 ‘MLK에 대해 알려진 반쪽짜리 진실’이란 칼럼 글을 올리고 킹 목사에 대해 3가지 관점의 시각을 소개했습니다. 애쉬랜드대학에서 미국사를 가르치는 대니얼 윌리엄스 교수는 그의 신학적, 정치적 견해가 당시나 지금이나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많이 달랐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주의 신학이 인종차별과 같은 특정 죄악을 거부하지 못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때마다 복음주의 전통이 그와 같은 악을 보지 못하게 한 신학적 맹점은 파악해야 한다면서 성경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킹의 신학이나 다른 흑인 기독교인들의 신학을 포함한 다른 기독교 전통에서 발견한 성경적 진리를 포함하는 신학적 교정을 채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함께 비폭력적 사랑을 통해 악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킹 목사의 모범은 그의 생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의 신학적 견해에 전부 동의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확신과 영감을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최초의 수도사 : 박해 없는 시대의 대안
356년 1월 17일 기독교 수도운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이집트의 안토니우스가 105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고독과 절대 빈곤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그는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사막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그의 시신이 경외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표식 없이 묻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전 재산이었던 자신의 겉옷을 알렉산드리아 감독 아타나시우스에게 전하라고 유언했습니다.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는 종종 최초의 수도사로 알려지지만 그의 전기와 다른 자료들은 그 이전에 많은 금욕주의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안토니우스 역시 수도 생활 초기 근처에 거주하고 있던 노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통상 그가 광야로 나간 지리적 이동을 통해 명성에 기여한 첫 수도사로 알려집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나일강변 작은 촌락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복음서 강해를 듣고 그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그가 감명을 받은 복음서 이야기는 젊은 부자 청년 일화(마 19:21)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사막으로 떠났습니다. 사막은 당시 조용하고 사람이 없으면서 신앙을 추구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당시엔 수도 생활을 통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로마제국에서 박해를 받다가 평화롭고 안전한 시대가 계속되자 신자들은 이를 사탄이 주는 유혹이며 타락이라 여겼습니다. 교회는 박해 속에서 좁은 길을 걸었는데 더 이상 박해는 없어졌고 좁은 길도 넓어졌습니다. 신자들은 진정한 믿음을 수도 생활에서 찾았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을 뒤로 한 채 인간 사회에서 벗어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육체와 정욕을 절제하는 생활이었습니다. 큰 도시에서 교회들이 수천 명의 세례 지원자들에 의해 에워싸여 있을 때 또 다른 수천 명은 고독 속에서 참된 신앙을 찾으려 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며칠간 금식하기도 했고 해가 진 후엔 한 끼만 먹고 지냈습니다. 그는 버려진 무덤에서 생활했으며 누군가 며칠 만에 갖다 주는 빵만 먹고 살았습니다. 35세에 환상을 받은 그는 인간 사회에서 더 떨어진 깊은 사막으로 옮겨 버려진 성채에서 거주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해지면서 각종 방문객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막에 있던 그는 대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로 두 번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 박해가 일어나자 자신이 순교자로서 최후를 마치려고 알렉산드리아에 왔지만 그의 초라한 행색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리우스 논쟁에 관련해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리우스는 ‘성자’ 예수는 성부에게 종속된 유사한 본질을 가진 성부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삼위일체를 거부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이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완전히 반박했다고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복음이 주는 진정한 위로를 말하다
1563년 1월 19일 거의 모든 유럽 개혁교회가 수용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Catechisms)이 독일에서 처음 출판됩니다. 요리문답 또는 교리문답은 기독교의 교리를 문답식으로 가르치는 형태나 책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문답식 교육은 이루어졌으나 교리문답 형식이 발전된 것은 초대 교회 때 세례교인을 가르친 데서 비롯됩니다. 이후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교리문답은 급속도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는 중세기에 일반 성도를 대상으로 한 신앙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종교개혁 이후 모든 성도에게 신앙의 본질에 대한 교리적 이해가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개혁자들은 대부분 교리문답을 썼습니다. 루터의 ‘대소요리문답’을 비롯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장로교회의 신앙문답서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Larger Catechism)과 평신도를 위한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이 유명합니다.요리문답은 제1문답(問答)이 유명한데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 질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입니다. 영어로 하면 “What is your only comfort in life and in death?”로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배로운 피를 흘려 내 모든 죄의 대가를 온전히 치르셨고 마귀의 권세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카락 하나라도 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할 만큼 나를 항상 지켜주십니다. 참으로 모든 일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지금부터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의 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이며 대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입니다. 장로교인이라면 친숙하실 겁니다.
교리문답은 어린이나 이제 막 신앙을 가지게 된 신자에게 기독교 믿음의 내용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됐습니다. 저자들의 자의적 교리가 아니라 문답 하나하나 모두 성경 구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실제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문에만 17개의 성경 구절이 사용됐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1559년 독일의 정치 지도자였던 프리드리히 3세가 당시 루터파와 멜란히톤의 루터파, 그리고 칼뱅을 위시한 개혁파로 분열돼 있던 종교 지형을 통합하기 위해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라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젊은 신학자를 불러 요청하면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우르시누스에게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를 아우르는 새로운 신앙고백 문서와 교리문답을 작성할 신학자와 목사들로 구성된 팀을 이끌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팀 안에는 자신들의 신학적 차이를 넘어 보편적인 복음에 대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처음부터 지역 주민이 가진 근심을 덜어주기 위한 문서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종교적 분열의 우려와 인간이 가진 근본적 불안과 염려에 대한 우려가 교리문답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붙들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복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당시 기록된 많은 고백 문서들이 하나님께 대한 교리와 신학적 주장으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인간이 처한 곤경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위로를 묻고 복음이 주는 위로는 우리 삶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답해줍니다. 삶이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모두 든든히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에 따르면 이 교리문답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일어서야 할지를 보여 준다고 합니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7대 총장을 지낸 크레이그 반즈 교수는 “우리가 가진 신경과 신앙고백, 교리문답 등을 통해 교회는 성경과 교회가 위치한 특수한 상황을 이어주는 다리를 만들었다”며 “신학자들이 작성하고 공의회와 교회 회의 등을 통해 확인된 문서들을 믿음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으로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이런 믿음의 유산들이 ‘나의 믿음’은 다름 아닌 ‘우리의 위대한 믿음’의 일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고 했습니다.
개신교의 대표적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은 흔히 7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벨직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 도르트신경(1618~16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1647)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648) 등입니다. 놀랍게도 이 문서들은 다른 저자들이 기록했지만 서로 동질성을 갖고 있으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 서적>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클레이본 카슨 엮음/이순희 옮김/바다출판사
[초대교회사]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엄성옥 옮김/은성
[오늘을 위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크레이그 반즈 지음/장호준 옮김/복있는사람
[개혁주의 신앙 고백의 하모니] 조엘 비키, 싱클레어 퍼거슨 지음/신호섭 옮김/죠이북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