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150여개국에서 4300여개 기업이 참가한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4’가 12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CES를 주관하는 미국 소비자기술협회(CTA)는 총 13만5000명 이상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성·현대차·SK·LG·HD현대 등 760여개 기업이 기술력을 뽐냈다. 중국(1100여개)과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았다.
“좋든 싫든, AI 시대 살고 있다”
이번 CES는 지난 1년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 열풍의 확장판이었다.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영역에 AI가 침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존 토머스 켈리 CTA 부사장 겸 CES 쇼 디렉터도 올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로 AI를 꼽았다. 교통과 모빌리티, 디지털 헬스케어, 스마트홈 같은 카테고리도 중요하지만 AI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모든 전시의 중심에 AI가 자리했다. 이미 AI 활용도가 높은 가전과 자동차는 물론이고 뷰티와 쇼핑 등 AI를 수단으로 하는 산업군이 무한하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CES 부스를 둘러본 뒤 가진 인터뷰에서 “좋든 싫든 우리가 이제 AI 시대에 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관전평 했다.
AI 시대를 선점하기 위한 기업 간 합종연횡은 빨라지는 추세다. 독일 최대 기술 기업 중 하나인 지멘스는 AI를 적용한 산업용 확장현실(XR) 헤드셋 개발을 위해 일본의 소니와 손을 잡았다. BMW는 운전자를 지원할 생성형 AI 탑재를 위해 아마존과 협력에 나섰고 소니 혼다 합작사는 마이크로소프트(MS), 닛산과 링컨은 구글과 파트너십으로 진일보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기아는 홈투카(Home-to-Car)·카투홈(Car-to-Home) 서비스 제휴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앞으로 현대차·기아 차량 내에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화면을 터치하거나 음성으로 명령하면 집에 있는 전자기기를 원격으로 제어하는 게 가능해진다. 삼성전자는 전기차 업체 테슬라와도 반도체, 에너지관리 솔루션 등에서 협력을 진행 중이다. HD현대는 구글 클라우드와 생성형 AI 플랫폼 구축을 위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다음 관심은 기기 자체에 AI 기술을 얹는 ‘온디바이스 AI’ 시대로 쏠린다. AI는 인터넷이 있는 환경에서 특정 사이트에 접속하거나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야 이용할 수 있다는 한계점을 또 한 번 뛰어넘는 것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와 AMD가 이번 CES 기간 AI 칩을, 삼성전자는 생성형 AI와 온디바이스 AI 시장을 겨냥한 D램 라인업을 각각 선보였다. 인텔은 클라우드가 아닌 기기에서 직접 대규모 언어모델(LLM)과 앱을 실행할 수 있는 첨단 칩을 탑재한 차세대 컴퓨터 AI PC를 준비 중이다.
퀄컴 크리스티아누 아몬 최고경영자(CEO)는 “AI가 클라우드에서 학습할 필요 없이 개개인이 매일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서로 문자를 보내는 등의 모든 것이 AI의 쿼리(질문)가 될 수 있다”며 “AI가 기기를 사용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컴퓨팅 플랫폼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모빌리티도 車 대신 기술
가전과 IT를 넘어 글로벌 자동차 업체가 대거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5대 모토쇼’라고 불렸던 CES는 올해 다른 느낌을 줬다. 실물 차량이나 콘셉트카의 전시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모빌리티 기업의 기술 향연으로 확전한 양상이었다. 올해 모빌리티 분야의 키워드 역시 AI였다. 또 모빌리티뿐 아니라 AI 기술을 접목한 무인·자동화 건설기계와 선박이 새롭게 CES 무대를 장식했다.
차량을 전시한 완성차 브랜드는 메르세데스-벤츠와 베트남 전기차 회사 빈패스트 정도였다. 현대차·기아도 이번 CES에서 자동차에 집중하기보다는 소프트웨어(SW)와 수소, 목적기반모빌리티(PBV)를 전면에 내세웠다.
차와 대화하는 ‘음성 비서’는 인기였다. 벤츠와 폭스바겐은 운전자의 의사소통을 돕는 고도화한 음성 지원 서비스를 선보였다. 혼다는 2026년 출시 목표인 전기차 ‘0 시리즈’를 공개한 후 독자 차량용 OS를 기반으로 한 사물인터넷(IoT), 커넥티드 기술 접목을 예고했다. 삼성전자와 처음으로 공동 부스를 꾸린 하만은 디지털 콕핏(디지털화한 자동화 운전공간) ‘레디 업그레이드’를 출품했다.
모빌리티 기업이 모여 있는 웨스트홀 전시장에는 HD현대와 두산그룹 등 한국 건설기계 회사가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번 전시의 주제를 ‘사이트 트랜스포메이션(Xite Transformation)’으로 정한 HD현대 전시관에는 가로 18m·세로 4.5m 규모의 대형 LED 화면 앞에 4.5m 크기의 대형 굴착기가 눈을 압도했다. 캐빈(조종석)이 없는 무인 굴착기의 실물 모형이다. 가상현실(VR) 트윈 체험기도 있었는데, 여기에 가수 지드래곤이 정기선 HD현대 부회장과 함께 탑승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국 기업 맹활약…정기선 키노트 데뷔
이번 CES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국가는 미국과 한국이었다. 코로나19 종식 이후 중국이 업체 수로는 가장 많이 참가했지만 굵직한 기업이 빠지면서 기술 측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모두를 위한 AI’를 주제로 내건 삼성전자는 기기 간 연결 경험에 AI를 더 접목해 차원이 다른 초개인화 기능을 제공하겠다는 포부를 각인시켰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스마트폰, TV·가전, 자동차까지 연결된 사용자 경험은 보다 정교하게 개인화된 서비스로 발전하고 있다. 여기에 AI가 접목돼 기기 간 연결 경험을 넘어 고객을 가장 잘 이해하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새로 선보이는 스마트폰 실시간 통역 기능, 영상 콘텐츠의 자막을 인식해서 자국어로 읽어주는 기능 등 제품의 핵심 기능을 온디바이스 AI로 구현하는 등 AI를 활용한 초개인화된 기능을 제공할 계획이다.
LG전자는 AI를 ‘공감지능’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전시관에는 더욱 진화한 AI 기술로 만드는 미래의 ‘스마트 라이프 솔루션’을 구현하는 등 각종 화려한 디스플레이와 출품작 볼거리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래 스마트홈에서 LG 씽큐(ThinQ)는 집 안 곳곳에 설치된 센서와 IoT 기기를 연결하고 고객이 직접 조작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기를 제어해 최적의 상태로 케어하는 서비스 플랫폼 역할을 진행한다. 조주완 LG전자 사장은 “우리의 초점은 AI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변화를 일으켜 고객에게 실질적인 이점을 제공하는지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XR 쪽에서 기회를 보고 있으며 메타버스가 생성형 AI가 나오면서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다가, 다시 (AI와 메타버스의) 협업 모델, 시너지 등이 얘기되고 있다”며 “저희가 가지고 있던 모바일 제조 역량이 깊이 활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즐길거리가 풍부한 ‘테마파크’ 콘셉트를 선보인 SK그룹 전시관에는 6만여명 이상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미국 뉴욕에서 온 관람객 오스틴 앤더슨은 “올해 CES에서 가장 차별화된 콘셉트의 부스”라며 “AI로 운세를 점치고, 로봇암의 역동적인 자동차 쇼를 관람하면서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즐겼다”고 말했다. 특히 인기를 끌은 ‘AI 포춘텔러’와 ‘댄싱카’를 두고 한 말이다. 일부 관람객은 댄싱카 앞 QR 코드를 찍어 추가 정보를 찾아보기도 했다. 댄싱카 안에는 18분 만에 80%까지 충전 가능한 SK온의 급속 충전 기술이 담겨 있다.
HD현대는 건설기계 장비를 들고 와 모빌리티관의 분위기를 바꾼 데 이어 정기선 부회장이 재계 총수 및 비(非)가전 회사 CEO로는 처음으로 CES 기조연설에 나서 눈길을 끌었다. 정 부회장은 AI와 디지털, 로봇 등 첨단기술을 입힌 HD현대의 ‘사이트(Xite)’ 혁신에 관해 설명하며 성공적인 국제무대 데뷔전을 치렀다.
재계 총수 총출동 ‘품앗이 투어’
정 부회장의 기조연설 현장에는 허태수 GS그룹 회장, 구자은 LS그룹 회장, 최재원 SK온 수석부회장, 롯데지주 신유열 전무 등이 응원차 들렀다. 이외에도 9일 개막일부터 재계 총수들은 경쟁사 전시관을 서로 방문하는 ‘품앗이 투어’를 활발히 했다.
이번 CES에서는 역대급 참석률을 보인 재계 총수를 가까이에서 직관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외국인들이 구름 인파를 몰고 다니는 총수를 보며 누구인지 묻는 장면도 자주 보였다. SK그룹에서는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범현대가에서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기선 부회장이, GS가에서는 허태수 회장과 허용수 GS에너지 사장, 허태홍 GS퓨처스 대표 등이 참가했다. 두산과 LG그룹에서도 박정원 회장과 구자은 회장이 직접 부스를 둘러봤다.
코골이 줄이는 베개·기계가 해주는 네일아트…스타트업 향연
전 세계 스타트업이 모인 ‘유레파 파크’는 미래의 애플과 구글을 꿈꾸는 창업의 열기로 가득 찼다. 참가한 스타트업만 1200개가 넘었다. 이 중 한국 스타트업은 440여곳이 부스를 마련했다. AI 기술을 더해 코골이를 줄이는 스마트 베개를 선보인 기업의 체험존이나 AI와 로봇공학 기술을 접목한 기기가 매니큐어를 대신 해주는 스타트업 등 혁신 기술을 선보인 기업 부스에 인파가 자연스럽게 몰렸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 스타트업도 참가했는데 규모는 전년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유레파 파크 가장 안쪽은 한국 스타트업이 차지했다. 대기업과 대학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은 곳이 많았다. 올해 CTA가 신설한 AI 분야 혁신상 28개 중 절반 이상인 16개를 한국 스타트업이 차지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사티아 나델라 CEO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운영하는 통합 한국관을 찾아 우리나라 스타트업 두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최태원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스타트업 부스를 돌며 기술에 관심을 보이고 지원을 약속했다. 일각에서는 전시가 끝난 뒤 ‘카피캣’이 등장하는 등 스타트업의 기술 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또 ‘기술’을 매개로 전시 공간을 꾸린 다른 나라 스타트업과는 달리 지자체나 학교 단위로 부스를 묶다 보니 장점을 부각하기 어려웠다는 지적도 나왔다.
CTA는 ‘CES 2025’는 내년 1월 7일부터 10일까지 나흘 동안 열릴 예정이라고 전했다.
라스베이거스=김혜원 조민아 허경구 기자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