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OO전자의 홍길동입니다. 메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전자제품 부품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송모(48)씨는 최근 위와 같은 내용의 연락을 받고 당황했다. 메일을 보낸 사람이 어떤 직급인지,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를 한참 고민했다는 것이다. 송씨는 “무턱대고 ‘요즘 스타일’로 ‘님’이라고 불렀다가 혹시 상대가 부장이나 팀장이라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다고 대놓고 직급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기도 민망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최근 ‘수평적 소통’을 중시하는 MZ세대가 기업에 자리잡으며 호칭 문화도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업무 이메일에 직급을 표기하지 않는 문화다. 실제 적지 않은 젊은 직장인들이 자신의 카운터파트에게 업무 관련 메일을 보내며 자신을 ‘홍길동 사원’ ‘홍길동 대리’ 등이 아닌 단순 ‘홍길동’으로만 표기하고 있다. 영어 이름을 차용해 부르는 회사의 경우 아예 실제 본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브라이언’ ‘제시카’ 등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사내 지침이다. 대기업들은 최근 ‘수평적 소통’을 강조하며 인사제도 개편을 통해 기존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시스템을 없애고 색다른 직급체계를 도입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6년부터 기존 직급 체계를 없애고 직급을 4단계(CL1~CL4)로 단순화했다. 연공서열을 타파하고 수평적 문화를 만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당시 내부에서도 혼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직원들이 회사에서 타 부서 사람을 만나면 그가 선배인지 후배인지 알아보지 못해 사내망(인트라넷)으로 기존 직급을 찾아보는 등 ‘가욋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SK텔레콤도 임원을 제외한 모든 직원 간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했다가 2018년부터는 ‘님’으로 바꿨다. 원하는 영어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SK하이닉스는 기술사무직 호칭을 TL(기술리더)로 부르고, 신입사원부터 부장까지 모두 PM(프로페셔널 매니저)이라는 호칭으로 통일했다. 대홍기획의 ‘쌤’, 제일기획의 ‘프로’도 이런 흐름 속에서 도입됐다.
문제는 이런 체계가 도입된 회사의 사원들이 외부와 소통할 때에도 내부용 직급을 쓰거나 아예 직급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잦다는 것이다. 2년차 직장인 김모(28)씨는 “내부용 직급을 알려줬다가 ‘사원’이라고 다시 정정해주는 것이 민망한 경우가 많다”며 “어차피 직급에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알려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각 회사에서 개별적으로 도입한 ‘프로’ ‘매니저’ 등 호칭의 경우 명칭만 들으면 어떤 일을 하는 직원인지 외부인으로서는 알기 쉽지 않다. 송씨 사례처럼 업무 메일에 무턱대고 “홍길동 드림”이라고 직급 없이 이름 석자만 적는 경우도 다반사다.
같은 호칭이라도 기업마다 사용되는 ‘용법’이 다르다는 점도 골칫거리다. 가령 제일기획에서는 부장급에게 ‘프로’라고 불러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한은행 일부 부서에서는 ‘프로’라는 호칭이 부장, 수석에 이은 가장 낮은 단계의 직급이다. 각 회사들과 거래하는 직원들 입장에서는 같은 호칭이라도 회사마다 다른 용법을 따로 암기하지 않으면 무례를 범하게 될 위험이 있는 셈이다.
이렇다보니 효율성을 이유로 기존에 폐지했던 직급 체계를 부활시킨 경우도 있다. 카카오는 2017년 임원 직급을 폐지했지만 기업 규모가 커지자 2019년 다시 부활시켰다. 네이버도 2017년 폐지했던 임원 직급을 2019년 다시 만들었다. 조직 내 권한·책임 문제와 리더십 부재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