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25살의 미국 여의사가 한 달 넘는 항해를 거쳐 조선 제물포항(지금의 인천)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에선 여성이 외간 남자에게 몸을 보이는 일이 금기시됐기 때문에 여성들은 병에 걸려도 의사 한 번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조선 여성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미국 여의사는 첫 여성전문치료소 ‘보구여관’을 설립했으며 자신을 따르던 소녀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 최초의 여성 양의(에스더 박)로 길러냈다. 또한, 눈먼 아이들을 위해 점자책을 만들기도 했다.
처음엔 말도 통하지 않았던 만큼 사람들은 이 여의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상을 입은 아이에게 이식하기 위해 직접 자신의 피부를 떼어내는 등 헌신하는 모습에 마음을 열었다. 조선에서 44년간 근대 의료와 교육에 헌신한 이 여의사는 바로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 조선에서 의료 선교를 함께했던 남편 윌리엄 홀과 딸 에디스를 병으로 잃고 절망하기도 했지만,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셔우드 홀 역시 의사가 되어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고 재정 마련을 위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했다.
지난 8~9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극장2에서 선보인 ‘로제타’는 바로 로제타 셔우드 홀을 소재로 한 연극이다. 브로드웨이 상업 연극에 맞선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 운동’의 기수이자 미국 최초 아방가르드 극단인 ‘리빙시어터’(The Living Theatre)가 한국 극단 극공작소 마방진과 함께 선보였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보낸 뒤 미국에서 성장한 뒤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활동 중인 요제프 케이(김정한)가 극작과 연출을 맡았다. 지난 1월 쇼케이스를 광주와 서울에서 선보인 뒤 이번에 본공연을 올렸다.
무대에는 리빙시어터 배우 3명과 마방진 배우 5명 그리고 연주자 3명이 올라갔다. 배우 8명은 모두 로제타로서 인물 안에 내재된 여러 자아를 연기하는 한편 로제타 주변의 인물들을 연기하기도 한다. 연극 ‘로제타’는 주역이 없지만 배우들 모두 똑같이 중요한 리빙시어터 특유의 ‘앙상블 테크닉’이 잘 드러난다. 여기에 리빙시어터는 원래 연출가도 연기하는 게 일반적인데, 연출가 케이는 연기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연주(건반과 기타)로 이번 무대에 섰다.
사실 연극 장르의 국제 협업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쉽지 않다. 그동안 협업의 의미에만 방점이 찍히고 공연 완성도를 만족시키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로제타’의 경우 작품의 소재와 형식 면에서 협업의 의미를 잘 살렸다. 무엇보다 한국어와 영어가 함께 사용되는 이 작품은 언어 문제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 배우가 영어로 로제타를 연기할 때 또 다른 한국 배우가 로제타의 내면을 한국어로 연기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대사 없이 몸짓과 음악으로 감정을 연기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여기에 한국 관객이 영어를 이해 못 하더라도 로제타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답답했던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번 작품에 배우로도 출연한 현재 리빙시어터 예술감독 브래드 버지스는 “리빙시어터가 그동안 이탈리아, 브라질 등에서 다양한 국제협업을 진행했지만 아시아에선 한국이 처음”이라며 “그동안의 협업은 문자 자체가 비슷한 언어권에서 이뤄졌던 것과 달리 한국어는 문자 자체가 달라서 답답한 부분이 많았다. 연습 내내 구글 번역기를 들고 살았던 것 같다. 과거 조선에 온 로제타의 심정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주디스 멀리나-줄리언 벡 부부가 1947년 설립한 리빙시어터는 파격적인 표현 방식과 함께 반전, 인종차별 반대, 여성 해방 등 진보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이에 대해 미국의 저명한 극작가 토드 런던은 “리빙시어터가 미국 연극사에서 사랑에 기초한 연극- 연극에 대한 사랑, 평화에 대한 사랑, 남녀 상호 간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성에 대한 사랑을 보여줬다”고 평가한 바 있다. 요제프 케이는 “인류애를 실천한 로제타의 삶이 리빙시어터의 정신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처음 협업을 제안했었다”면서 “앞으로 이 작품을 미국과 유럽 등에서 투어 공연하는 것을 계획중”이라고 밝혔다.
광주=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