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각자도생’ 넘어 ‘개인회생’ 몸부림치는 나라

입력 2023-12-03 18:37

지난 21일 법원행정처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올해 10월까지 접수된 개인회생 신청건수가 9만9868건으로 지난해 전체 건수인 8만9966건을 이미 넘어섰다. 이 추세라면 개인회생 신청이 가장 많았던 2014년의 11만707건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10년 만에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우는 셈이다.

익히 알듯이, 기나긴 코로나19의 터널을 지나면서 소상공인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 터널을 빠져나오며 마주한 세상은 녹록하지 않았다. 치솟기만 하는 고금리와 고물가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뒷걸음질 치기 바쁘다. 그렇다고 미래가 밝은 것도 아니다. 한국은행은 지난 30일 내년 경제성장률 예상치를 또 하향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희망을 품은 예상치라는 걸 알만한 사람은 안다.

문제는 소상공인들만이 아니다.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의 개인회생 신청건수도 급증하고 있다. 신청자 중 30세 미만 비율이 매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항간에서는 이를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투자나 빚투(빚내서 투자)라는 말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전세 사기의 주요 대상이 열심히 노력해 작은 전셋집이라도 마련했던 청년들인 세상, 암호화폐나 주식이 아니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작은 사다리에 올라탈 기회조차 얻지 못해 한탕의 유혹으로 내몰리는 현실에서, 그들만 탓하기엔 기성세대나 정부가 너무 무책임하다.

노인 파산은 또 어떤가. 법원에 접수된 개인파산 신청자 10명 중 4명이 60세 이상이다. 이 또한 매년 증가하고 있다. 각각의 사정은 다 다르겠지만, 30년 넘게 우리 경제의 버팀목으로 일해왔던 사람들이 퇴직이나 실직 후 몇 년 만에 파산이라는 나락에 떨어진다. 더구나 잠재적 파산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 또한 매년 늘고 있다. 독거노인 가구 수도 전국 가구 평균 9.1%다. 이는 지방으로 갈수록 열악해져 전남의 경우 15%나 된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노인빈곤율이 월등하게 1위인 이유들이다.

중국 고사 중에 ‘積善之家 好運來(적선지가 호운래)’라는 말이 있다. ‘선을 쌓은 집에 좋은 운이 온다’는 말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어느 날, 중국 시탕(西塘)의 한 가게 주인은 자기 가게 앞 좁은 처마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거지를 보았다. 그게 안쓰러웠던 주인은 거지에게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비를 피하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가 사양하자 주인은 처마 밖에다 발을 쳐서 비를 막아주었다. 다음날이 되자 거지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積善之家 好運來’라는 글씨만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가게는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주인은 이 모든 게 거지의 은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가게 앞 거리 전체에 차양을 쳤다. 그 거리는 지금도 차양 친 긴 골목이 있고, 여전히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걸 보면, 아직도 ‘호운’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유행한 지도 한참이 지났다. 우리는 모두 잘 도생하고 있는가. 개인회생의 통계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나 정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그들의 탓으로 돌리기만 할 뿐이다. 어떤 ‘적선’도 기대하기 힘들다. 우리는 흔히 적선을 동냥질하는 사람에게 인심이나 쓰는 말로 알지만, 원뜻은 ‘착한 일을 많이 함’이다. 하지만 착한 일은커녕 동냥질하는 손길도 뿌리치고 있는 게 작금의 우리 사회와 정부의 현실이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힘들고 빈곤한 사람들에게 ‘착한 일’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나랏일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써주고 싶다. ‘積善之政 好運來(적선지정 호운래)’. 그럼 혹시 아는가. 내년이면 금리와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성장률도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고, 소상공인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개인회생이나 파산 건수도 확 줄어들지. 중국 시골의 가게 주인도 한 일을 우리 정부가 못할 리 있겠는가. ‘선을 쌓은 정부에 좋은 운이 온다’는 말을 믿고 싶다. 문제는 앞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선을 먼저 베풀어야 효험이 생긴다는 점이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