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 출발점 ‘묵향’ 10주년 기념공연

입력 2023-11-30 15:36 수정 2023-11-30 15:59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의 출발점인 국립무용단의 ‘묵향’은 사군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국립극장

패션 디자이너이자 영화 미술감독, 브랜드·공간·전시 등의 비주얼을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는 국내 무용계에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연출뿐만 아니라 무대·의상·조명·소품 등 미장센 전 분야의 디자인을 맡아 한국 전통무용에 현대적 감성과 세련미를 부여했다.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의 출발점인 국립무용단의 ‘묵향’이 12월 14~1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10주년 기념공연을 가진다.

사실 정구호와 무용계의 인연은 2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현대무용 안무가 안성수의 작품에서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한 것이다. 이후 그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알려진 것도 안성수와 함께한 국립발레단의 ‘포이즈’(2012)와 국립무용단의 ‘단’(2013)이었다. 화려하되 미니멀한 그의 연출과 무대·의상·조명 디자인은 춤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영화 미술감독, 브랜드·공간·전시 등의 비주얼을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 그는 한국 무용계에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국민일보DB

그리고 사군자를 모티브로 한 국립무용단의 ‘묵향’(2013)은 바로 그와 전통의 만남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작품이다. 고(故) 최현(1929∼2002)의 ‘군자무’를 바탕으로 윤성주 당시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이 안무한 이 작품에서 정구호는 아름다운 네 폭의 수묵채색화 같은 미장센을 만들어냈다. 화선지의 흰색을 기본으로 매화의 진분홍, 난초의 녹색, 국화의 진노랑, 대나무의 먹색을 포인트로 한 한복과 조명이 춤과 어우러진 무대는 관객을 먼저 시각적으로 사로잡는다.

‘묵향’은 초연 당시 무용·의상·음악 등 작품을 이루는 요소는 최대한 전통 양식을 유지하면서, 극도로 세련된 무대 미학으로 동시대 한국춤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관객과 평단의 호평 속에 초연 6개월 만에 재공연되는 등 국립무용단의 흥행작이 됐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프랑스·캐나다·미국 등 10개국에서 공연되며 한국 전통춤의 매력을 세계에 뽐냈다.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의 출발점인 국립무용단의 ‘묵향’은 사군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국립극장

‘묵향’의 성공은 지난 10년간 한국 무용계를 설명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인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의 출발을 알렸다. 정구호는 이후 국립무용단에서 ‘향연’(2014) ‘춘상’(2017) ‘산조’(2021)을 선보였으며 전북도립국악원에서 ‘모악정서’(2019), 경기도무용단에서 ‘경합’(2022), 서울시무용단에서 ‘일무’(2022)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나섰다. 정구호와 국립무용단의 작업이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지역의 다른 공공 무용단도 앞다퉈 정구호를 초빙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작품 가운데 ‘향연’과 ‘일무’는 ‘묵향’ 못지않은 성공을 거뒀다.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에 대한 대중의 뜨거운 지지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반응은 엇갈린다. 정구호가 무용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고 전통의 현대적 소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대단한 역할을 한 것에는 이견이 없다. 또한, 춤 창작에 있어서 안무 못지 않게 연출과 미장센의 힘을 무용계가 인식하게 만든 것도 소득이다. 다만 안무보다 연출에 지나치게 방점이 찍힌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이 전통춤에 대한 창의적 해석보다는 스펙터클한 이미지에 머무른다는 아쉬움이 제기된다. 여기에 정구호 스타일 한국무용이 인기가 있자 지역 공공무용단까지 따라 하는 것은 한국 무용계의 다양성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