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 악몽 떠올라”… ‘숨은 남혐찾기’에 기업들 골머리

입력 2023-11-27 00:02 수정 2023-11-27 00:02
논란이 된 메이플스토리 캐릭터 '엔젤릭버스터' 리마스터 소개영상의 한 장면. 유튜브 캡처

인기 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 등 주요 게임에서 남성혐오성 이미지가 차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게임사들이 한밤중 줄줄이 사과문을 올리는 등 소동이 일었다. 기업들 사이에서는 10여년 전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됐던 ‘일베 논란’을 의식해 빠른 대응에 나서는 분위기다.

27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넥슨은 전날 새벽부터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 던전앤파이터모바일 등 홈페이지에 ‘부적절한 혐오성 이미지가 홍보물에 사용된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는 취지의 공지문을 올렸다. 블루아카이브 이터널리턴 에픽세븐 등 다른 게임 다수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일어 해명문을 냈다.

이 게임들은 전날부터 ‘남성혐오성 이미지를 홍보물에 넣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특정 커뮤니티에서 집게손 모양의 이미지를 남성비하 용도로 사용하는데, 이런 이미지가 홍보물 곳곳에 삽입됐다는 것이다. 의혹을 제기한 이들은 해당 홍보물을 제작한 외주 업체로 ‘스튜디오 뿌리’를 지목했고, 결국 이 스튜디오는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손동작이 영상 곳곳에 들어갔다는 의혹이 있다. 불쾌감을 느끼게 해드린 것에 잘못을 통감한다”며 사과문을 게재했다.

2021년 논란이 됐던 GS25의 '캠핑가자' 이벤트 포스터

때아닌 ‘남혐 논란’이 터지며 기업들은 자신들도 타깃이 되지 않을까 긴장하는 모양새다. 이미 GS25, BBQ, 경찰청 등은 2021년 광고·홍보물에 남성혐오성 표현을 삽입했다는 논란에 휘말려 사과문을 올리는 등 홍역을 치렀다. 특히 GS25는 이 사건으로 불매운동 대상이 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10여년 전 사회를 달궜던 ‘일베 논란’이 다시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2010년대 초·중반 당시 보수 성향 커뮤니티를 표방한 ‘일간베스트’ 이용자들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홍보물이나 광고 등에 일베를 상징하는 손가락과 이니셜 이미지를 몰래 삽입해 온라인에 배포했다. 자신이 만든 합성물이 지상파 TV 뉴스나 기업 공식 홍보물 등에 실리면 커뮤니티에 이를 ‘인증’하는 방식으로 과시했다.

당시 이들의 타깃이 됐던 대상도 광범위하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주요 대학부터 시작해 커피전문점, 영화, 마트, 스포츠 등 업계 회사들의 마크가 변형돼 유포됐다. 이런 식의 ‘일베 합성물’이 TV 뉴스에 사용된 ‘방송사고’만 수십 건에 달한다.

연세대학교의 로고에 일베 이니셜이 삽입돼있다. 정상적인 연세대 로고는 'ㅇㅅ'이 들어가지만 변형된 로고에는 'ㅇㅂ'이 들어간다. 밑에 사진은 변형된 마크가 TV 뉴스에서 사용된 장면. 유튜브 캡처

기관·기업들이 이번 논란을 인지했음에도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교묘하게 삽입된 혐오 표현을 실제로 적발해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메이플스토리 등 홍보영상을 보면 혐오 표현이 짧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찾아낸다 해도 ‘단순한 손가락 모양일 뿐’이라고 주장하면 달리 대처할 방법이 뾰족하게 없다.

엔터테인먼트업계 홍보 담당자는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원청 업체가 외주 콘텐츠를 전수조사하고 문제 되는 부분이 있는지 찾는 수밖에 없다”면서도 “인력과 시간이 없어서 외주 업체를 고용하는 것인데, 완성된 콘텐츠를 다시 샅샅이 뒤져야 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날벼락을 맞은 게임업계는 이번 논란에 선제적으로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넥슨은 논란이 불거진 시각이 한밤중이었음에도 사실 확인에 앞서 의혹이 제기된 콘텐츠 대부분을 비공개 처리했다. 다른 주요 게임들도 디렉터 등 운영진 명의의 입장문을 발표하며 진상 조사에 돌입했다.

김창섭 메이플스토리 디렉터는 전날 유튜브 생방송에서 “넥슨은 맹목적으로 타인을 혐오하고 그것을 드러냄에 있어서 일련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문화, 그리고 그런 것들을 몰래 드러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다”며 “타인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문화와, 그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메이플스토리를 유린하도록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