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에 이끌려 억지춘향으로 법정스님이 쓴 ‘무소유’라는 책을 산 게 1986년이었던 것 같다. 당시 스무 살 열혈 청년은 가볍게 일독했으나,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성인이 되어 ‘내 힘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웅대한 꿈을 꾸던 시기에 무소유가 가당키나 했겠는가. ‘리바이어던’에서 토마스 홉스가 일갈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속 세상에서 웬 나약한 소리란 말인가.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스님은 인간의 소유욕을 경계하였지만, 청년은 일렁이는 소유욕으로 치열하게 살아갔다. 모든 욕망이 그렇듯, 욕심낸다고 모두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욕망의 끝에 달린 허무를 달래기 위해 간간이 ‘무소유’를 꺼내 읽어봐도, 결국 다시 투쟁의 세상 속 만인으로 돌아가곤 했다. 젊을 적 이야기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無所有)의 역리(逆理)이니까.”
요즘 사석에서 특정 검사 출신 인사들 이야기가 빠지질 않는다.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입방아에 오른다. 마치 소유욕의 화수분 같다. 흔히 돈과 명예, 권력을 한꺼번에 욕심내면 탈이 난다고들 했다. 그런데 권력의 칼을 쥔 사람이 돈을 탐하고도 성에 차질 않아 명예마저 탐한다. 이 모두 소유욕이다. 그러니 스님의 말씀처럼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불가에서는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번뇌를 ‘탐진치(貪瞋癡)’로 정하고, 이를 삼독(三毒)이라 했다. 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중 가장 센 독은 ‘탐욕’이 아닐까 싶다. 성냄과 어리석음은 욕망의 영역이 아니지만, 탐욕은 욕망덩어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크게 버리는’ 걸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그럴듯해도, 사람은 세상에 와서 가기까지 백 년 가까이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크게 버리진 못해도 욕심을 줄이는 건 해볼 만하지 않을까. 독을 좀 멀리하면 덜 중독되고, 덜 욕심내면 ‘크게 버릴’ 일도 없지 않겠는가. 바리때 하나만 있으면 부러울 게 없는 스님처럼 말이다. 이래저래 날씨도 세상도 수상하니, 법정스님의 말씀을 돌아보게 하는 요즘이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