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정치 실종’에 멍드는 헌재…권한쟁의 접수 올해 9건 ‘껑충’

입력 2023-11-19 13:03

헌법재판소 권한쟁의 심판 사건이 2017년 2건에서 올해 9건으로 급증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 전통적 권한쟁의 사건뿐만 아니라 법안 처리 과정의 여야 극한 대립이 헌재로 넘어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법조계에서는 정치적 갈등이 대화로 해결되지 않고 사건화되는 ‘정치의 사법화’가 갈수록 심화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탄핵 등 정치 쟁점화한 사건들이 헌재에 몰려들면서 국민 기본권 침해 사건처리가 지연된다는 우려도 크다.

19일 헌재에 따르면 권한쟁의 사건은 2017년 2건, 2018년 2건, 2019년 6건, 2020년 5건, 2021년 2건, 2022년 5건, 올해(11월 현재까지) 9건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2017~2018년에는 모두 정부나 지자체 관련 사건이었지만 2019년부터 여야 간 대립에서 발생한 사건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최근 들어 정치적 사건이 헌재로 과도하게 넘어온다는 우려는 헌법재판관들 사이에서도 공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위법관 출신 원로 법조인은 “정치는 옳고 틀린 게 없는데 사법은 옳고 틀린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사법부가 정치 사건의 판단을 내리면 패소한 쪽은 사법부를 비판하고, 국민 사이에서도 사법 불신이 초래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헌재에서는 사건접수가 연간 3000건에 달하는 상황에 여야 간 분쟁 사건까지 몰려들면서 사건 처리 부담이 더 높아졌다는 토로가 나온다. 헌재 관계자는 “정치 사건은 아무리 좋은 결정이 나와도 한쪽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그로 인한 사법 신뢰 저하는 장기적으로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극한 정치 갈등 때 폭발한 권한쟁의
선거제 개편안과 사법제도 개혁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놓고 여야의 극한 대치가 이어지던 2019년 4월 26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의안과 앞에서 여야 의원을 비롯한 보좌진 및 당직자들이 몸싸움을 하고 있다. 뉴시스

권한쟁의 심판은 국가기관 혹은 지자체 사이 권한의 존재 여부나 범위에 대한 다툼이 벌어졌을 때 헌법재판소가 유권해석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다. 통상 중앙정부와 지자체 사이 벌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경기도 화성시가 2017년 4월 국방부의 수원 군 공항 이전사업에 반발해 낸 권한쟁의 심판 등 2017~2018년 4건은 지자체와 중앙정부, 지자체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이었다.

하지만 2019년부터 극한 여야 대립에서 비롯된 권한쟁의 사건들의 비중이 커졌다. 2019년 권한쟁의 6건 중 4건이 ‘국회 패스트트랙 파동’에서 비롯됐다. 당시 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 등 ‘4+1 협의체’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립 등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를 밀어붙였고 그 과정에서 당 지도부 방침과 달리 법안 통과에 반대하던 사법개혁특별위원회 바른미래당 의원들이 의사에 반해 교체됐다. 이들은 문희상 국회의장 등을 상대로 “법률안 심의·의결권을 침해받았다”며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자유한국당 제외 ‘4+1 협의체’는 그해 12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도 통과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당 의원들이 문 의장을 상대로 낸 2건의 권한쟁의 사건이 추가 접수됐다.

민주당과 위성정당이 180석이라는 기록적 의석수를 획득한 2020년 4월 총선 이후에는 여야 대립이 더 극심해졌다. 지난해 5월 민주당의 ‘검수완박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과 관련해서는 국민의힘 의원과 국회의장 사이 권한쟁의 사건 등 총 3건이 헌재에 접수됐다.

올해도 여야 대립이 이어지면서 3건의 권한쟁의가 접수됐다. 민주당이 주도한 ‘방송3법 개정안’과 ‘노란봉투법’ 국회 본회의 직회부 관련한 권한쟁의 사건이 2건 접수됐다.

민주당이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과 손준성·이정섭 검사 탄핵소추안을 철회했다가 다시 추진하는 것과 관련한 권한쟁의 사건도 지난 13일 헌재에 추가 접수됐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 111명 전원이 청구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민주당을 겨냥해 ‘야바위꾼’ ‘개딸 아바타’ 등 거친 표현도 쏟아졌다. 2020년부터 현재까지 헌재 접수된 21건의 권한쟁의 사건 중 8건이 여야 대립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정치 사건에 국민 기본권 사건 지연 우려도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법무부 측 소송 대리인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이 지난해 9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검수완박' 법안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공개변론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권한쟁의·탄핵 등 정치적 사건은 주목도가 높고 쟁점이 첨예해 일반적인 헌법소원 사건보다 더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모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헌재에 접수된 사건은 9명의 재판관과 70여명의 헌법연구관들이 배당을 받아 결론을 내린다. 올해 8월 기준 헌재 전체 사건이 3471건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연구관 한 사람당 수십 건의 사건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규모가 큰 정치적 사건이 접수되면 헌재 내부에서는 일종의 태스크포스(TF)가 꾸려진다. 검수완박 권한쟁의 심판,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 심판 등 주요 사건의 경우 통상 연구관 5~6명 이상이 투입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개변론까지 열어야 하는 중요 사건의 경우 연구관이 8명까지 투입되기도 한다.

이종석 헌재소장 후보자는 지난 13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헌재 심리가 지연된다는 지적에 “중요 사건이 굉장히 증가했다는데 그런 사건은 연구관 4~6명이 집중적으로 몇 달간 자료를 검토하고 보고서를 작성해야 해서 다른 사건 수십 건을 처리하는 정도의 품이 든다”고 말했다.

특히 직무 권한 정지 등 문제로 결론을 시급히 내려야 하는 탄핵 사건 등에 투입된 경우 기존에 맡던 사건 처리는 사실상 일시 정지된다. 헌재는 현재 유류분 제도 위헌 소송 등 국민 실생활과 밀접하거나, 사형제 위헌 소송·기후위기 소송 등 한 사회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 사건들을 다수 심리 중이다. 헌재 연구관 출신의 변호사는 “헌재가 국민의 기본권 침해 관련 헌법소원 사건 같은 핵심적 과제에 좀 더 집중해야 하는데 정치적 사건에만 휘말리다 보면 그런 사건 처리는 지연될 수 있다”고 말했다.

헌재 연구관을 지낸 한 법조인은 “결국 공장에서 기계가 하는 게 아닌 사람이 하는 일이라 정치적 중요 사건을 맡다 보면 당연히 다른 일을 못 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의 사법화’ 넘어 ‘헌재 제도의 오남용’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이 지난달 16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헌법재판소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2019년부터 현재까지 국회 갈등에서 비롯된 권한쟁의 사건은 13건 중 11건이 헌재에서 기각되거나 각하됐다. 2건은 아직 심리 중이라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다.

탄핵 사건의 경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결정을 제외하면 5건 중 3건이 기각 또는 각하됐다. 안동완 검사 탄핵 사건은 현재 심리 중이다.

권한쟁의 심판 사건 헌재 결정은 정치 행위의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형성돼왔다. 절차상 하자나 위법성을 지적하더라도, 정치 행위의 결과나 법안을 무효화하지는 않는 식이다. 탄핵 사건도 공직자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불법의 중대성이 크지 않는 이상 각하·기각해왔다. 헌재는 정치적 책임을 묻는 곳이 아닌 사법기관으로서 규범적 시시비비를 가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이 기각 혹은 각하를 예상하고도 ‘지지층을 향한 보여주기’ 등 정치적 목적으로 권한쟁의나 탄핵 심판을 남발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상겸 동국대 법대 명예교수는 “의원 중에는 법조인 출신들도 많다. 결과를 알면서도 시도해보는 것”이라며 “국민에게 어필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로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 사회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을 넘어 ‘사법 제도의 오남용’에 이르렀다”며 “‘사법적 결정을 따르겠다’ 수준이 아닌 ‘정치적 결정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단계”라고 지적했다.

국회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달 16일 헌재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도읍 법제사법위원장은 “지적보다는 반성문을 쓰고자 한다”며 “결국 국회가, 정치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건을 헌재에 떠넘김으로써 재판이 지연되고 그 피해가 국가와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반성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가 미숙하고 무능해 헌법재판이 지연되고 그 피해를 국민이 보는 일이 더는 없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형민 박재현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