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백화점에 간다.’ 찬바람이 스미는 한겨울 추위에도 따뜻한 기분에 빠져들게 하는 불빛, 무심코 지나던 이들의 시선마저 사로잡는 세련된 색감,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영상이 백화점 외벽을 휘감으며 연말의 들뜬 기분을 간질인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사람들이 백화점을 가는 이유다.
지난 16일 서울 영등포구 더현대 서울을 방문한 최유은(36)씨도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기분을 만끽했다. 최씨는 하루 연차휴가를 내고 일찌감치 오전 11시쯤 더현대 서울에 도착했다. 5층에 마련된 크리스마스 마켓부터 찾아가 입장 대기를 예약한 뒤 백화점을 둘러봤다. 이른 시간이라 기다리는 이가 적은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며 크리스마스 마켓 입장 알림을 기다렸다.
최씨는 “대기 예약 1시간20분 남짓한 뒤에 입장 안내 알림이 왔다. 점심을 기꺼이 미루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석구석 살펴봤다. 아쉬움 없이 구경하고 사진도 즐겁게 찍었다”며 “작년엔 크리스마스 마켓을 꾸미기만 했는데 올해는 상품을 팔아서 더 좋았다”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백화점이 핫플레이스로 등극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연관 검색어로 백화점이 등장하고,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같은 소셜미디어에는 백화점을 방문한 ‘인증샷’과 ‘인증쇼츠’가 넘나든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롯데백화점 본점, 더현대 서울처럼 대표적인 백화점 명소를 LED전구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되면 백화점은 ‘소비 구역’에서 ‘추억을 만드는 공간’으로 스위치된다.
사람이 모이면 구매로 연결된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본점에 미디어 파사드(건물 외벽 등에 LED 조명을 설치해 구현한 미디어 작품)에 점등한 뒤 주말 기준 구매객수가 60%가량 증가했다.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들어서면 구매객수는 2~3배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백화점업계가 크리스마스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는 건 이런 까닭에서다. 1년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준비에 들어가는 식이다. 비용을 공개하지 않지만 LED로 외벽을 꾸미는 데만 수십억원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미디어 파사드는 ‘크리스마스 백화점’의 원조 격이다. 올해는 375만개의 LED칩을 사용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연출이다. 지난해에는 글자를 새기는 것으로 갈음했던 돌출부도 올해는 모두 LED로 덮었다. 외벽 전체가 ‘63m×18m’ 규모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변신했다. LED칩과 철골은 지난해 썼던 것을 다시 사용해 친환경에도 신경을 썼다.
신세계 본점 외벽에서는 지난 9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크리스마스 영상이 반복 재생된다. 3분가량의 영상은 미디어 파사드로는 오후 5시30분부터 10시30분까지 반복해서 상영되고, 신세계백화점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올해는 ‘신세계 극장’을 주제로 크리스마스 판타지극을 선보인다. 영상에서 붉은 커튼이 걷히면 커다란 문이 열리고, 금빛 사슴을 따라 크리스마스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경쾌한 캐럴, 꼬마병정, 루돌프, 테디베어, 선물 기차, 크리스마스 트리로 둘러싸인 아이스링크를 넘나든다. 삽입곡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2번과 크리스마스 캐럴로 채워졌다.
신세계 본점의 크리스마스 장식은 50여년 전통과 함께한다. 매년 본관 파사드에 조명이 켜질 때쯤 연말을 느낄 수 있는 장식을 준비해 왔다. 서울의 크리스마스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됐다. 2014년 처음으로 ‘미디어 파사드’를 선보였고, 2017년에는 외관에 20m짜리 대형 트리를 설치했다. 2019년 본점 본관에 스토리가 있는 3분6초 길이의 콘텐츠를 담긴 미디어 파사드로 ‘크리스마스에는 백화점에 간다’는 통념을 만들었다.
롯데백화점도 본점에서 승부를 걸었다. 지난 3일 ‘마이 디어리스트 위시’(My Dearest Wish)를 테마로 삼았다. 연말이면 편지로 안부를 전하던 향수 어린 감성을 아날로그 이미지로 소화해냈다. 서울 중구 본점 앞 100m 거리를 유럽의 크리스마스 상점거리로 연출했다. 쇼윈도를 통해 움직이는 피규어, 크리스마스 선물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형 미디어 파사드에 공을 들였다. 크리스마스 스토리를 담은 애니메이션으로 꾸린 롯데백화점 본점 미디어 파사드는 소설가인 정세랑 작가와 협업해 약 1년 가까이 준비한 작품이다. 베스트셀러 ‘보건교사 안은영’ 등으로 유명한 정 작가와 3개월간 협업해 크리스마스 요정 ‘똔뚜’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오는 24일부터 본관 1층 포스트오피스에서 동화책 1500부를 한정 판매할 계획이다. 관련 애니메이션은 영플라자 미디어파사드를 통해 연말까지 상영된다.
현대백화점은 더현대 서울을 크리스마스 핫플레이스로 삼았다. 더현대 서울 5층 사운즈 포레스트에 꾸려진 ‘H빌리지’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테마로 삼았다. ‘해리의 꿈의 상점’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의 작은 공방이 모여있는 이국적인 골목길을 구현해냈다.
전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골목을 즐기는 경험’까지 더했다. 국내 최대 규모인 3300㎡(약 1000평) 크기에 크리스마스 마켓을 조성해 16개의 부티크(상점)와 마르쉐(시장), 6000여개의 조명 등으로 꾸몄다. 골목의 우체국, 케이크숍, 그릇공방 등 따스한 크리스마스 감성이 묻어나는 골목길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마련했다.
정민규 현대백화점 VMD팀 책임 디자이너는 “현대백화점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콘텐츠를 선보이기 위해 눈으로만 보는 콘텐츠에서 나아가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성과는 수치로 확인되고 있다. 이달 초 진행한 1차 사전예약은 오픈 후 1시간 만에 마감됐고, 오픈 첫날 현장 웨이팅은 800번대까지 올라갈 만큼 인기였다. 지난 1일 오픈 이후 주중 5000여명, 주말 1만여명이 더현대 서울 크리스마스 마켓을 방문하고 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동화 속 골목길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19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돼 유럽 전역에 유행한 미술공예 양식인 ‘아르누보’ 시대 디자인을 구현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량 생산이 아닌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이는 수공예적 측면이 강한 ‘아르누보’는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영감을 받아 장식적인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고 전반에 걸쳐 아르누보 양식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