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잇따른 폐 질환 원인이 가습기살균제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지 12년이 흘러서야 기업에도 책임이 있다는 점이 사법부에서 인정됐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그동안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던 이들이 유사 소송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가족을 떠나보낸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피해자들로선 이번 판결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분위기다. 수백만원의 위자료로 기업의 배상 책임을 제한해 오히려 면죄부를 줬다는 게 피해자들 얘기다. 법원이 기업뿐 아니라 정부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9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모씨가 판매사인 옥시레킷벤키저(옥시)와 제조사인 한빛화학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두 회사가 공동으로 김씨에게 5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는 2007년 11월부터 2011년 4월까지 매해 겨울마다 옥시의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다. 살균제 사용 중 기침 등 증상이 발생해 2010년 5월부터 병원치료를 받았고, 2013년 5월 간질성 폐 질환 등의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보건 당국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질환으로 볼 수 없어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며 ‘3등급’ 판정을 내렸고 김씨는 1·2등급 피해자와 달리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 피해 인정 범위를 확대한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시행 전 기준, 3·4등급은 5083명으로 당시 정부에서 조사·판정받은 이들의 90%에 달한다.
이에 김씨는 2015년 옥시와 한빛화학을 상대로 2000만원의 위자료를 달라며 소송을 냈다. 1심은 김씨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2심은 “피고들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에 설계상 및 표시상의 결함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원고가 신체에 손상을 입었다”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김씨가 2018년부터 특별구제급여 지원 대상자로 인정돼 월 97만원을 받는 점을 고려해 위자료를 500만원으로 산정했다.
피해자들은 대법원판결이 너무 늦게 나왔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가습기살균제 간질성폐질환 피해 유족과 피해자 단체 대표인 김미란씨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화가 나고 미칠 것 같아서 대법원판결 소식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위자료 500만원에 우리가 좋아해야 하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질병 당국에 의해 3·4등급으로 판정받은 이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가 상당한데, 500만원의 위자료는 터무니없다는 게 김씨의 지적이다. 김씨 부친은 4등급을 받았지만, 2015년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김씨는 “똑같이 피해를 겪고 죽었는데 3등급 피해자는 500만원만 받으라고 한다. 누구를 위한 사법부인가”라며 “10년 넘게 기다려 대법원까지 가서 나온 게 위자료 500만원이다. 기업에 준 면죄부다. 국민 목숨을 이렇게 하찮게 여기는 사법부가 어디 있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유족인 최윤수씨도 기업 책임이 이제야 인정됐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다. 최씨는 2010년 아내를 떠나보낸 뒤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초창기에 피해가 심각한 사람들에게만 보상해주고 기금만 내고 끝이었다”면서 “이후에 나온 피해자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진즉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면 되지 않았나”라고 얘기했다. 최씨는 “피해자들은 대법원판결을 반기지 못한다”라며 “잘못된 나라라는 생각밖에 없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했다.
정부 책임도 인정돼야 가습기살균제의 진정한 피해복구가 가능하다는 얘기도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은 9년째 진행 중이다.
박혜정 가습기살균제 환경노출확인 피해자연합 대표는 “(대법원판결은) 기업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중요한 건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라며 “1990년대에 처음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출시될 때 정부가 제대로 검증과 허가 절차를 하지 않아 피해가 확산했는데, 정부만 책임을 안 지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비판했다.
김재환 박재현 기자 j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