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끼임사’ 제빵공장의 기록…“10년간 덮개 닫힌 거 못 봐”

입력 2023-11-07 13:12
고용노동부 발간 '중대재해 사고백서' 캡처

“정 반장이 소스 혼합 중이던 처리실 문을 열었을 때는 가로 70㎝, 세로 77㎝, 그리고 전체 높이 1m 정도인 혼합기 통에 가형(가명)씨의 상체가 끼어 다리만 보이는 상황이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SPC그룹 계열사 SPL의 경기도 평택 제빵공장에서 발생한 20대 근로자 사망사고를 포함해 실제 발생한 주요 중대재해 10가지 사례를 다룬 ‘중대재해 백서’를 최초 발간했다고 6일 밝혔다.

기업명은 영문자로, 사례자는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장소와 사고 발생일 역시 다르게 각색했다. 그러나 SPL 사고 처럼 사회적 파장이 컸던 사안의 경우 기업명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기업의 작업 환경, 재해 원인 등을 상세하게 담았다.

고용부 관계자는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 국민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면서도 사실관계의 엄밀성을 유지했다”며 “사고 예방을 위한 사례별 전문가 조언과 관련 안전보건 수칙 등을 담아 경영책임자들이 중대재해를 막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작성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0월 15일 발생한 SPL 제빵공장 사고는 10가지 사례 중 두 번째로 다뤄졌다. 당시 23세였던 A씨가 샌드위치용 소스를 섞는 밤샘 작업을 하다 퇴근을 불과 1시간 반가량 남겨놓고 소스 혼합기에 상반신이 끼어 목숨을 잃은 사고다.

백서에 따르면 A씨는 원료를 운반할 때에만 2인 1조로 근무하고 소스를 혼합하는 일은 혼자 도맡았다. 혼합 작업 도중에는 기계 안에 손을 집어넣어 반죽을 떼어내거나 섞는 경우가 많았는데, 생산 물량을 맞추기 위해 기계를 멈추고 일하는 작업자는 없었다는 게 현장 근로자들의 증언이다. A씨 역시 돌아가는 기계에 손을 넣었다가 몸이 빨려 들어가며 화를 입었다.

특히 근로자들은 “작업 전에 조회할 때는 형식적으로 ‘뭐는 위험하니 하지 마라, 며칠 전에 사고가 났다’는 식으로 경고만 해주지 혼합기 뚜껑을 덮고 작업하거나, 열려 있을 때는 기계 작동을 멈추거나 중지하라는 지시를 받아본 적도 없다”고 전했다. A씨가 사용하던 혼합기에는 소스통 오른편 제어장치에 비상정지장치 버튼이 있었지만, A씨는 오른팔이 먼저 기계에 끼었기 때문에 비상정지장치 버튼을 누를 수도 없었다.

혼합기기에 설치된 인터로크(interlock) 시스템. 덮개를 열 경우 자동으로 기기가 멈춘다. 중대재해백서 캡처

SPL 공장의 끼임 사고는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2020년부터 2022년 7월까지 총 3년간 발생한 57건의 재해 중 12건이 끼임 사고로, 총 23건의 넘어짐 사고 다음으로 많은 사고였다. SPL은 자체적인 ‘안전보건경영지침서’에서도 ‘혼합기 작동 시에는 덮개를 열지 않아야 하며, 덮개를 열 경우 자동으로 멈추는 인터로크(interlock) 시스템을 갖출 것’을 적시해 놓았다.

그러나 공장에 있는 10개 혼합기 중 덮개가 있는 것은 6대, 이 중 2대만 인터로크 장치가 장착돼 있었다. 심지어 덮개는 작업 전·중·후 상시 개방되어 있었고 실제로 사고 발생 직전인 2022년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덮개를 사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10년 넘게 SPL 공장에서 일해온 한 직원은 “회사 다니면서 뚜껑이 닫혀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직원들과 가장 가까운 관리감독자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 있지 않은 점도 문제였다. 냉장 샌드위치 라인의 또 다른 반장은, 관리감독자로 선임된 이후 시험은 치렀지만, 연간 16시간의 관리감독자 법정 교육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고, 들은 바도 없다고 했다. 자신이 관리감독자로 선임된 사실을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내부 직원들은 ‘잠재위험발굴카드’ 제도를 통해 끼임과 말림 위험에 대해 여러 번 제보하고 개선을 요구했다고 한다. 백서는 기업의 대표이사가 선임 직후부터 안전보건과 관련된 업무 보고를 받았다며 “충분히 끼임이나 말림 사고의 재발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재해 조사를 담당한 산업안전보건감독관과 안전보건공단 등의 관계자들이 “보통 이 정도 권고를 하면 수용하는데…”라며 탄식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지난해 10월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SPC 본사에서 평택 SPC 계열사 SPL의 제빵공장 사망 사고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서는 SLP 사고 외에도 작업자 3명이 매몰된 삼표산업의 양주 채석장 붕괴사고, 중대재해처벌법 1호 판결로 기록된 고양 요양병원 증축현장 근로자 추락 사망사고, 중대재해법 첫 기소 사례인 두성산업의 16명 급성중독 사고 등을 다뤘다.

지난해 1월 발생한 채석장 붕괴사고의 경우 기업 대표이사가 안전보건관리책임자인 현장 소장에게 “날씨가 갑자기 풀려서 붕괴된 걸로 하고 토사를 쌓은 기간은 10년으로 대답하라” “석분토(슬러지) 쌓아놓은 것도 문제 될 테니 ‘석’자도 꺼내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 잘못된 관행을 숨기려고 한 정황도 고스란히 담겼다.

요양병원 증축 공사장 추락사고는 추락 방호망, 안전대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던 소규모 건설 현장에서의 비극이었다. 안전책임자는 사고 조사에서 “(안전보건관리체계에 대해)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건설현장 사고는 중대재해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서용윤 동국대 산업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백서를 통해 “중대재해처벌법의 의의 중 하나는 안전관리를 현장 수준의 안전조치를 넘어서 기업 경영의 수준으로 올렸다는 점”이라며 “유해·위험요인 발굴과 개선 활동을 지속 가능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경영책임자가 핵심일 수밖에 없다. 경영책임자는 지속적인 위험성 평가에 기반해 사람과 기계간의 상호작용하는 위험요인들을 근로자와 함께 확인하고 개선하며 재발 방지를 막는 무의식적 안전체계를 종사자에게 제공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이번 백서는 사고 예방을 위해 현장에 실제 도움이 되는 자료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며 “앞으로도 재해 예방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공개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세종=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