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이후 넓어진 업무 범위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30대 수의사 A씨에 대해 법원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A씨의 완벽주의 성향을 사망 원인으로 보고 산업 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던 근로복지공단은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박정대)는 유족 측이 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은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지난 9월 14일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제약회사에서 2016년부터 수의사로 일한 A씨는 2020년 1월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반려동물 관련 신제품 개발 업무를 새로 맡았다. 평소 축산·수산·양봉 등 업무를 맡았던 A씨는 생소한 업무에 적응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유족에 따르면 A씨는 2020년 10월 말부터 “자존감과 업무능력이 떨어진다”고 호소했다.
A씨는 같은 해 말 출시 예정인 신제품의 포장지에서 성분이 잘못 기재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더 큰 어려움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하루 수면시간이 2~3시간으로 크게 줄어 정신과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복용했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또 “팀장이 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것 같다. 표정을 보면 안다”며 가족에게 자신이 더는 승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과 무력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결국 A씨는 2020년 12월 23일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A씨의 죽음이 업무상 스트레스 때문이라면서 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하지만 공단은 “회사 업무로 인한 압박보다는 업무에 대한 개인적인 완벽주의 성향과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현실로 인한 것”이라면서 유족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업무상 사유 외에 우울증이 발병해 극단적 선택에 이르렀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는 동기나 계기가 보이지 않는다. 업무상 스트레스가 개인적인 성향을 한층 더 강화시켜 우울증을 악화시켰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법원 감정의는 업무상 스트레스·피로 등이 우울증 발병·악화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으나 단일 요인이 아니라는 다소 조심스러운 소견을 제시하기는 했다”면서 “그러나 그 자체로 고인의 업무상 스트레스가 하나의 원인임을 인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업무와 재해 발생 사이의 인과 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규범적 관점에서 타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면 증명됐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공단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정헌 기자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