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NGO 중 해비타트는 국내에서도 단연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국제해비타트를 2005년부터 이끈 조나단 렉포드(61·사진) 총재의 삶은 그에 비해 소개가 덜 됐다. 특히 그가 한국과 인연이 많고 깊은데도 말이다. 렉포드 총재는 삶과 신앙의 전환점을 사회생활 초년 때 한국에서의 경험을 꼽았다.
렉포드 총재는 지난 26일 본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잘 나가는 기업인이 비영리 단체의 대표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데는 한국에서의 경험처럼 예상치 못한 삶의 여정이 결국 하나님의 소명이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는 최근 제9회 아시아태평양 주거포럼 한국 첫 개최로 방한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금융가인 월스트리트에서 일했다. 그러나 당시를 “원하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한 장학재단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으로 파견된 뒤 계획하지 않던 일들이 펼쳐졌다. 1988서울올림픽에서 마케팅 업무에 참여했으며, 이 인연으로 미국에서 일을 그만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하며 한국 조정팀 코치를 맡게 됐다. 렉포드 총재는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해고된 감독을 대신하는 일을 했다”며 “코치를 할 만큼 전문적인 실력은 없었지만 계속된 요청에 코치직을 수락했고 이 덕분에 한국 문화에 흠뻑 빠졌다. 동시에 자기 객관화를 통해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 머물면서 같은 장학재단으로 대학 교단에 선 목사와 나눈 교제도 그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함께 성경을 읽었고, 깊은 신학 토론을 나눴다며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기반을 둔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고백했다. ‘일상의 신학’을 역설한 미국 신학자 프레디릭 비크너의 소명 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인용한다고 한 그는 “소명은 마음속 깊이 담긴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후 렉포드 총재는 스탠포드 대학교 경영 대학원 MBA 과정에서 NGO 경영 관련한 공부를 했고, 이후 메리어트, 월트디즈니 등 유명 기업에서 임원을 지내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후 인도 선교여행에서 최빈곤층의 삶을 목도한 뒤 미네소타주 한 교회에서 목사로 2년여간 살았다. 그러던 중 국제해비타트 총재직을 제안받았다. 렉포드 총재는 “교회에서의 소임을 다하며 느낀 것, 그동안의 쌓은 경영 능력이 해비타트의 큰 사명을 위해서 쓰라는 기다림의 시간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렉포드 총재는 국제해비타트를 통해 수많은 집을 지었다. 7년 전 16살 딸과 함께 봉사한 캄보디아 한부모 가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로 꼽았다. 그는 “방이 하나밖에 없는 작은 집이었는데, 다 지어진 집에 우리를 초대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비가 새는지 안 새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안도의 표정을 짓더라”며 “수년이 흐른 뒤 그 가정의 소득이 5배가 오르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집이 생겼다고 삶이 수월해지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소명을 완수한 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렉포드 총재는 국제해비타트가 단지 튼튼한 집을 지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가정이 건강하고 안정적인 공동체에 소속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고 했다. 그는 “삶의 안정, 생존을 넘어 심리적 안정을 주는 커뮤니티까지 구성하는 것이 헤비타트의 사명”이라며 “우리는 그들을 위해(For)가 아닌 함께(With) 집을 짓고 그들이 가진 조건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려 한다”고 덧붙였다.
국제해비타트는 더 많은 집을 짓는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각 국가가 마주한 다양한 종류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주택 생태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렉포드 총재는 “빈민가 등 비공식 거주촌에서 제대로 된 주택에서 살지 못하는 인구가 10억에 달하고 특히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몰려있다”며 “그러나 그들도 우리와 같이 똑같은 희망과 꿈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