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 지난 8월부터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 공격을 함께 계획했다는 내부 증언이 나왔다. 양측은 수차례 회의를 열어 계획을 구체화했고, 지난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공격을 확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 개입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중동 분쟁이 확대될 우려가 커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8일(현지시간) 하마스와 레바논 무장세력 헤즈볼라 고위 관계자 등을 인용해 “이란 안보 당국자들은 하마스의 지난 7일 기습 공격을 계획하는 데 도움을 줬으며, 지난 2일 베이루트에서 열린 회의에서 대규모 공격이 승인됐다”고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이란의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장교들은 지난 8월부터 하마스와 협력해 유대교 안식일 날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공중 및 지상, 해상 침공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WSJ에 따르면 가자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하마스와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F),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이슬라믹지하드(PIJ) 등 이란의 지원을 받는 4개 무장 단체 대표와 IRGC 장교들이 베이루트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통해 작전의 세부 사항을 구체화했다고 한다. IRGC의 계획은 이들 4개 단체가 사방에서 동시에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다중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WSJ은 설명했다.
WSJ는 무장 단체 협력을 주도한 인물로 IRGC의 정예부대 쿠드스군 사령관 사다르 이스마일 카니를 지목했다. WSJ는 지난 4월 “카니는 레바논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스라엘을 둘러싼 여러 민병대 간의 협력을 시작했으며, 하마스가 헤즈볼라 등 다른 단체와 처음으로 긴밀히 협력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회의 직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이란 지시에 따라 레바논과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제한적 공습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들 단체 대표들은 지난 8월부터 레바논에서 최소 격주로 쿠드스군 지도자들과 만나 이스라엘 공습과 이후의 일들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카니는 헤즈볼라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 PIJ 지도자 알 나칼라, 하마스 군사 책임자 살레 알 아룰리 등과 직접 회의에 참석했다고 WSJ은 설명했다. 헤즈볼라 관계자는 호세인 아미르 압돌라히안 이란 외무장관도 최소 두 차례 회의에 참석했다고 전했다.
이란의 직접 개입이 밝혀지면 이란과 이스라엘의 오랜 분쟁이 중동의 더 광범위한 분쟁으로 확대될 위험이 커진다. 이스라엘 고위 안보 관리들은 이란이 이스라엘인 살해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이란 지도부를 공격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자살폭탄 테러 등 극단 노선을 표방하는 PIJ 등이 합류할 경우 공격 양상도 격렬해질 우려가 크다.
이미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공격 이후 엑스(X·옛 트위터)에 “시오니스트 정권은 팔레스타인 민중과 이 지역 전역의 저항 세력의 손에 의해 근절될 것”이라며 환영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다만 미국과 이란 정부, 하마스는 이란이 이번 공격에 직접 개입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은 이날 CNN 인터뷰에서 “이란은 오랜 기간 하마스를 지원해 왔다”면서도 “이번 공격을 지시했거나 배후에 있다는 증거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마스의 고위 간부 마무드 미르다위는 이스라엘 공격에 대해 “하마스가 자체적으로 공격을 계획했다”며 “이것은 팔레스타인과 하마스의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길라드 에르단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는 이날 회견에서 “우리는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이란이) 이스라엘을 둘러싼 다른 테러 군사조직 리더들과 회의한 사실을 알고 있다”며 “우리 지역의 이란의 대리인들은 이란과 최대한 협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리나 카팁 런던대학교 중동연구소장은 “이 정도 규모의 공격은 수개월의 계획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이란과의 공조 없이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며 “하마스는 헤즈볼라와 마찬가지로 이란의 사전 명시적 동의 없이 단독으로 전쟁 참여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WSJ은 “이스라엘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집권 이후 정치적 분열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을 노린 것”이라며 “이란이 위협적으로 보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 정상화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하마스와 헤즈볼라 고위 인사들을 인용해 설명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