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한해 동안 한국은행이 정부 대신 납입해야 할 국제금융기구 출연·출자금이 3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법은 해당 금액을 정부 예산에 반영해 처리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를 우회하는 꼼수가 내년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외환보유고를 사실상 마이너스통장처럼 써 온 정부가 한은 대납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7일 기획재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제금융기구 출자·출연금 납입 보고서’에 따르면 한은은 내년 한 해 동안 정부 대신 국제금융기구에 약 2900억원을 출자할 계획이다. 기구 별로 따져보면 국제개발협회(2114억원), 아프리카개발기금(465억원), 국제금융공사(193억원) 순으로 출자 규모가 컸다.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신인도와 지위를 높이고 저소득 개발도상국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해 출자 및 출연금을 내고 있다. ‘국제금융기구에의 가입조치에 관한 법률’은 국제통화기금(IMF) 등 17개 기구를 국제금융기구로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출자금 대부분을 한은에 대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법에는 ‘출자금을 예산에 반영하도록 노력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정부는 ‘예산에 반영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한은이 대납하게 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활용해 한은에 출자 부담을 떠넘겨 왔다. 2014년부터 지난 7월까지 한은이 정부 대신 납부한 국제금융기구 출연·출자금은 모두 12조6832억 원으로 조사됐다. 전체 출연·출자금의 92% 수준이다. 이 기간 정부가 낸 돈은 1조947억원에 그쳤다.
한국은행이 대납한 금액은 외환보유고에서 빠져나갔다. 외환보유액 대비 대납금액 규모 비중은 연평균 0.08% 수준이다. 다만 2016년에는 IMF 쿼타 증액분 70억 달러를 대량 납입해 대납금 비중이 2.05%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이에 출자금 납입이 외환보유액 감소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재부가 국회의 심의·의결을 거치지 않고 외환보유고를 사용한다는 비판도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국회의원 시절인 2019년 국정감사에서 한은의 대납 관행과 관련해 “정부의 안일한 지출 관행”이라며 “법 취지에 어긋난 관행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추 부총리가 취임한 이후에도 대납 관행은 이어지고 있다.
기재부는 출자의 경우 장기간 협의에 따라 결정돼 예산 주기와 부합하지 않을 때가 많아 사전 예산 반영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한은이 출자를 대신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없다”며 “출자금은 어차피 돌려받는 돈”이라고 말했다.
반면 선진국은 대부분 국회의 승인을 거쳐 국제금융기구 출자 규모를 결정하고 있다. 일본은 국제금융기구 가입 시 의회의 승인을 받고, 해당 기관에 대한 출자 및 증자는 ‘가맹조치법’에 따라 처리한다. 독일은 국제금융기구의 참여를 포함한 다자간 협력 활동을 연방경제협력개발부(BMZ)가 담당하는데 BMZ의 모든 예산은 독일 국가예산에 포함된다.
세종=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