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20] 단칼에 끊어진 담배

입력 2023-09-26 16:02

1990년 12월 31일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우리 교회 기도원인 리버사이드 국제 금식 기도원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1991년 1월 1일 신년 축복 성회가 시작되었다. 찬양과 설교 말씀이 끝나고 기도를 올리는 시간, 불현듯 그로 하여금 담배를 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십 년을 담배를 피워왔다. 갓난아기가 있는 방에서도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사람이다. 운전하면서도 담배를 피웠는데, 열린 창문도 꼭꼭 닫아 놓고 차 안을 곰의 굴처럼 만드는 사람이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가 하는 일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기는 세상에 다시없는 귀한 외아들이었으므로.

이민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아파트 동네를 구경 나간 적이 있었다. 사는 곳이 엘에이 한복판이다 보니 홈리스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겁이 났는지 열 살이나 어린 아내에게 하는 말,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외아들이니까 도망을 가야 해.” 당연히 그렇지 않냐는 식으로 내게 한 그 말. “너는 딸 많은 집 셋째 딸이니까 죽어도 되잖아?” 하는 의미로 들렸다면 지나친 생각이었을까? 결혼 초, 처가에 바라는 것이 그렇게도 많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너는 종로 사거리에 갖다 버려도 주워 갈 사람도 없어”라고 말한 사람이다. 거기다가 돈을 버는 사람은 나 하나인데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은 언제나 당연하다.

시장엘 가도, 할인판매를 하는 시들시들한 사과 몇 개를 사려고 고르고 있으면 어디선가 달려와서 소리를 지른다. “내가 먹지도 않는 것을 뭐 하러 사?” 그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비싼 굴젓이나 게장 같은 것을 카트에 올려놓는다. 뭐든지 자기 위주, 마누라는 그렇다고 해도 자식들이 먹을 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 거기다 그 비싼 담배를 아예 보루 채로 사는 사람. 그렇게 사는 이유는 그만큼 담배를 많이 피우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혼자 벌어서는 살기 어려운 세상에 수입은 외벌이 이고 아파트관리비, 자동차 보험료, 식비 등 써야 할 곳은 많은데!

그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000를 묶고 있는 담배 원수 마귀는 묶음을 놓고 떠나갈지어다~~~!” 상황이 절박한 만큼 창자가 쏟아져 나올 정도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부르짖었다. 딱 그 한마디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보통, 기도원에 오면 담배를 피울 수가 없어서 공연히 짜증을 내는 사람이었는데, 그날 그 시간 이후에 이 남자는 담배 냄새조차 맡을 수가 없어졌다. 내 코에는 담배 냄새가 나지도 않는데, 어디선가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며 구역질을 하다니…? 아주 한칼에 담배가 끊어졌다. 최소한 30년을 불태워 사르던 흡연 습관이 한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을 결단코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확.실.하.게. 역사 하신다. 그 이후 16년, 그가 내 인생에서 뿌리 뽑혀 나가던 그 날(2007년 11월 12일)까지,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2023년인 지금도,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날까지 담배를 구입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즉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서 4: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베드로전서 5:8, 9)

1970년 10월 17일에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2004년 8월 10일 자로 이혼을 하고도 3년이나 더 뭉개고 있다가, 그가 자기 짐들을 싣고 내 인생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던 2007년도 11월 12일, 당시 다섯 살과 일곱 살이던 손녀와 손자에게 그가 했다는 말, “네 할머니는 돈도 한 푼 없고 운전도 못 하지만 할아버지는 운전도 잘하고 돈도 많~~다.”

틀린 말이 아니다. 미국에 들어온 이후, 나는 운전을 하지 않고(못하고) 지냈다. 운전은 전적으로 그의 담당이었고, 그래서 그는 열 살이나 어린 아내를 일터에 데려다 주고 데려왔으며 매주 아내가 받는 수입을 당당하게 가지고 갔다. 자기 마누라는 자기 소유이고 자기가 출퇴근을 시켰으니 아내가 일해서 받은 돈은 당연히 자기 돈이었으니까.

직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미국에서 운전하지 못하면 장애인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운전을 하게 되든지 말든지 좌우지간에 운전면허를 따 놓고 보자 결심을 하고, 운전면허를 따지 않는 한 일을 하러 가지 않겠다고 데모(?)를 했다. 그래서 1984년 4월에 기어이 운전면허를 취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동차를 두 개나 사용할 수 없는 재정 사정으로 운전을 할 기회는 없었다. 그렇게 딴 내 운전면허증과 더불어 사회보장카드, 은행 수표책은 그가 몽땅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그것들을 어디나 두었는지 내내 알지 못했다. 한번은, 그것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니, 냅다 소리를 지르면서 하는 말, “당신이 무엇 때문에 그것을 알려고 해?”

그렇다. 어차피 한 지붕 아래서 사는 이상은 그것을 내게 줄 사람도 아니고, 해서 그 일을 접어 두었다. 그러지 않아도 늘 피곤하고 지친 내가 언제나 잘 먹고 잘 자서 늘 활력이 넘치는 그에게 빌미를 주게 되면 괴롭힘이나 당하는 결론이니, 뭐 하러 바보짓을 하겠는가? 가끔 그가 심심해서 시비를 거는 눈치가 보이면, 아예 “예, 잘못했습니다”하고 애초에 말려들어 들볶일 일을 피하곤 했다. 한번은 큰 아이가 그 상황을 보더니 “아니, 엄마가 뭐를 잘못했다고 맨날 그래?” 화를 냈다. 그게 지 어머니의 생존의 방법인 것을 아이가 어찌 알랴? 자기가 먼저 죽을 경우, 자기 시체를 꺼낸 후 나를 밑에 묻고 그 위에 자기 시체를 덮으라고 말하는 그였다. 죽은 후에라도 나를 짓누르고 있겠다는 심보.

엘에이에는 한인들이 많아서 한인 시장도 많고 한인 여행사도 많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할인판매를 할 때가 있어서, 처음으로 그랜드캐니언으로 버스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나를 햇빛이 드는 창가로 앉히고 자기가 통로 쪽에 앉아서는 아무나 하고도 이야기를 못 하게 하는 것은 물론,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은 차라리 혼자 하든가 마음 맞는 친구와 가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분명히 밖에 있는데 감옥에 갇혀 지낸 2박 3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65세가 되어 Welfare(한국의 기초생활 수급과 유사)를 받게 되자 내게 이혼을 요구하고(2002년), 이혼을 완료하고(2004년), 마침내 빠져나간 2007년 11월 12일. 그리고 그해 12월 1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