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전기차 전환 스케줄이 꼬여버리게 생겼다. 내연기관차 퇴출을 강력히 외치던 유럽과 미국 등에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속도조절론’이 부상하고 있어서다. 전기차 전환에 수천억원을 투자하고 있는 완성차 업체들은 일관성을 유지해 달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24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리사 브랜킨 포드 영국 대표는 “전기차 사업을 하려면 정부의 (전기차 전환에 대한) 야망, 약속, 일관성이 필요하다”며 “그러나 이번 조치는 이 모든 걸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지난 20일(현지시간)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시점을 기존 2030년에서 2035년으로 늦춘 것에 대한 반발이다.
영국은 ‘탄소 배출 제로(0)’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연기관차 조기 퇴출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비싼 전기차 가격, 충전 인프라 부족,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는 자동차 산업 종사자의 반발 등의 벽이 낮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BMW 역시 CNN에 보낸 성명에서 “자동차 업계엔 전기차 관련 정책에 명확성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마이크 호즈 영국 자동차공업협회(SMMT) 회장은 “내연기관차를 단계적으로 퇴출하려면 정부가 명확하고 일관된 메시지, 매력적인 인센티브, 충전시설 등을 제공해 불안감보다 확신을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피아트, 푸조, 시트로엥, 크라이슬러 등을 둔 완성차그룹 스텔란티스도 같은 취지의 입장을 냈다.
이미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각국 정부로부터 전기차 대전환을 강요받는 것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었다. 올리버 집세 BMW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스위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내연기관차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한 유럽의 전기차 정책은 편협한 결정”이라며 “유럽 각국 정부가 기대하는 것처럼 전기차 가격이 하락하거나 충전 인프라 구축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도요타 아키오 토요타 전 사장은 “정답이 무엇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한 가지 선택지(전기차)로 국한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완성차 업체들은 각국 정부의 전기차 전환 스케줄에 맞춰 대규모 투자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BMW는 전기차 ‘미니 일렉트릭’을 2030년부터 전 세계에 공급하기 위해 최근 영국에 6억 파운드(약 9813억원) 규모의 투자를 발표했다. 스텔란티스도 약 1억 파운드(약 1635억원)를 들여 영국 엘즈미어 포트 공장을 개조해 이달 초부터 전기차 생산을 시작했다.
미국도 전기차 전환 계획에 변화가 생길 조짐이 감지된다. GM·포드·스텔란티스 등 미국 ‘빅3’를 상대로 전미자동차노조(UAW)가 대규모 파업에 나서고 있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보급 계획에 불만을 갖고 있는 자동차업체 노동자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에 대규모 전기차 투자를 단행한 현대차그룹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