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산업의 기술 주도권을 둘러싼 ‘보호무역주의’ 파고가 거세지고 있다.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까지 중국산 전기차와 배터리의 역내 시장 침투에 견제구를 날리고 나섰다.
EU가 최근 중국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실태조사를 선언한 배경에는 전 세계 전기차·배터리 시장을 파고드는 중국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있다. 러시아산 액화천연가스(LNG)에 의존하며 ‘에너지 주도권’을 빼앗긴 유럽이 배터리 분야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사전 정지작업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EU는 중국의 거센 반발을 진화하는 동시에 ‘탐색전’을 모색 중이다. 24일 외신 등에 따르면 EU 통상정책을 총괄하는 발디스 돔브로우스키스 EU 수석 부집행위원장은 지난 23일(현지시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금융회의 연설에서 “중국과 디커플링(공급망 등 분리)을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무역 등) 개방성이 남용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U의 지난해 대중(對中) 무역적자 규모는 4000억 유로(한화 560조원)에 이른다. 돔브로우스키스 부집행위원장은 “일부 전략 제품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다음달 5일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열릴 EU 정상회의에서도 ‘중국 의존도 완화’는 핵심 의제로 떠오를 전망이다. 최근 로이터통신에서 입수·보도한 EU 경제안보 보고서에는 “강력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던 것처럼 리튬이온 배터리를 중국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담겼다. 유럽은 2021년 기준으로 전체 가스 소비량의 40%를 러시아에 기대고 있다. 향후 전기차용 배터리 수요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탈(脫)중국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중국은 세계 배터리 시장의 66%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중국 CATL은 올해 상반기에 글로벌 배터리 출고량 1위(32.7%)를 차지했다. 중국 BYD는 11.3%로 세계 2위인 LG에너지솔루션(16.5%)을 바짝 뒤쫓고 있다. 한국과 중국을 제외한 제3국 기업의 배터리 시장 침투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SNE리서치는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업체가 단기간에 세계 10위권으로 진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진단했다.
EU는 궁극적으로 전기차·배터리의 역내 생산을 유도한다. 미국과 비슷한 전략이다. EU는 중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에 매기는 관세를 현행 10%에서 미국의 대중 관세(27.5%) 수준까지 높이는 걸 검토하고 있다. 이것도 자국 내 생산 확대를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산업계에선 EU의 중국 견제가 한국 배터리 업계에 ‘틈새 기회’로 작동할 수 있다고 관측한다. 전혜영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유럽 내 170기가와트시(GWh) 이상의 생산능력을 확보한 한국 배터리 기업의 수요 증가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대비 성장성은 낮지만 유럽 시장의 판도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